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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정치적 편먹기의 시대 상황을 깨려면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5.08 18:25

수정 2024.05.08 18:25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내 편, 네 편으로 나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편먹기는 세상을 움직이는 추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게 지나치면 단순 무식한 유아의 세계, 혹은 난폭한 야만의 세계가 열린다. 정치권이 유권자의 편먹기 놀이를 지나치게 부추긴다는 데 근원적 문제가 있고, 식자층마저 편먹기의 과열을 경고하는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는 데 오늘날 시대의 비극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요즘 세계 곳곳에서 유권자는 흑백 피아(彼我) 구분에 집착하며 편을 가르고 있다.
정치권은 이를 정략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식자층은 이를 제어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 이주자, 여성 인권, 성 정체성, 인종차별, 청년실업, 노인복지, 기후변화, 낙태, 총기 소지 등 크고 작은 이슈, 심지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처럼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이슈 등 수많은 논란거리가 단순 무식한 내 편, 네 편 대결구도를 유권자의 심리에 심어놓고 있다. 이는 좌파 대 우파, 진보 대 보수, 여권 대 야권, 여성 대 남성, 노인 대 청년, 기득권 대 소외층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집단적 편먹기는 인간 본성에서 자연스레 초래되므로 순수하게 볼 수도 있다. 인간은 살아남고 또 잘살기 위한 기제로 '우리'라는 집단을 만든다. 때론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상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 아니면 남이라는 단순화에 의존한다. 차별적 집단의식은 사회 작동 및 역사 변화의 순수한 원동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속 편먹기가 과도할 때 유치하거나 야만적인 선악 전쟁으로 비화하게 된다. 남에 대한 무조건적 증오, 내 편에 대한 무비판적 감싸기는 개인의 이성적 판단 불능을 뜻하므로 결국 공동선, 정의, 사회적 효용에 대한 열린 논의를 불가능하게 한다.

오늘날 시대 상황은 편먹기 심리를 극대로 팽창시키고 있다. 사회관계의 파편화, 대중의 원자화, 사회구조의 급변화, 미래의 불확실성은 사람들을 막연한 불안감과 반권위적 불신감에 빠지게 한다. 이런 불안정한 심리의 사람들은 무조건 따르고 의지하는 내 편을 만들고 동시에 분노를 배출하는 희생양으로 상대편을 만듦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받고 인식의 길잡이를 찾으려 든다. 편에 따른 이들의 '내로남불'식 이중성은 과장, 허위, 막말, 욕설 등 각종 비상식적, 말초신경 자극적 충격을 통해 더욱 강화되어 간다.

이런 외부충격을 양산하는 곳이 바로 정치권이다. 권력 지상주의에 빠진 정치꾼들은 유권자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내 편이 될 만한 유권자만을 자극·흥분·동원의 대상으로 삼고 나머지는 지지층의 증오를 쏟아낼 과녁으로 전락시킨다. 정치꾼들의 전략적 극단주의가 유권자를 양극적 편먹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도널드 트럼프다. 한국에선 지난 총선에서 여야 양측에 의해 양극화가 극대로 커졌고, 새 국회 개원을 앞두고도 몇몇 강경론자가 국회의장직·상임위원장직 선출과 관련해 유권자의 이분법적 심리를 또 부추길 발언을 하고 있다.

정치권의 책략에 의한 편먹기 현상은 예전부터의 일이다. 다만 파편화·원자화·급변화라는 오늘의 시대 상황이 유권자의 심리를 정치적 편먹기에 당하기 쉽게 만든 것이다. 여기서 아쉬운 건 식자층의 역할이다. 고학력 시대에 무슨 식자층 타령인가 하겠지만,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며 정파성에 휘둘리지 않고 중립지대를 형성하는 계층이 있다.
학자, 교사, 법조인, 공무원, 과학기술자, 사회단체 활동가, 의료인, 언론인 등으로서 개인의 양심에 따른 공적 문제의식을 지니고 정치적 편먹기에 반명제로 작용한다. 이들 식자층이 소리를 내야 국민의 편먹기 경향이 완화될 수 있다.
근래 무기력하게 제 역할을 못 하는 이들이 언제쯤 어떤 방식으로 깨어날지 초조해지는 요즘이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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