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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선동열도 신고식은 호됐다… 완봉 앞둔 8회서'5실점'[기록을 남긴 선수 기억에 남는 선수]

성일만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4.06 16:59

수정 2020.04.06 16:59

선동열 머리 얹던 날
1985년 7월 2일 대구서 데뷔전
해태 유니폼 입고 7회까지 무실점
8회서 흔들리며 첫 홈런 허용
韓 통산 367경기 1647이닝 던져
28개 홈런밖에 내주지 않아
1997년 日에선 38세이브 기록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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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도 새끼였던 시절은 있다. 장차 천하를 호령할 대호도 첫 사냥은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다.

선동열(사진)도 예외없이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지금 생각하면 선동열의 프로야구 데뷔전을 현장에서 취재한 것은 기자로서 행운이었다. 1985년 7월 2일 대구야구장. 하필 선동열이 그 경기에 나왔다.

대구야구장 기자실은 2층에 있었다.
푹푹 찌는 대구 여름 날씨를 에어컨 없이 견디는 일은 곤욕이었다(당시엔 기자실에 에어컨이 없었다). 그러나 이날 만큼은 그렇게 더운 줄 몰랐다. 마운드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다.

김일융과 선동열의 맞대결. 1984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첫해 16승, 이듬해 25승을 거둔 재일동포 투수 김일융. 36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도로 건너가 11승을 거둔 이색적 경력을 지녔다. 일곱 색깔 변화구를 던진다는 현란한 기교파 투수였다.

선동열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대학시절(고려대) 최고 구속 155㎞의 강속구를 구사한 국보급 투수. 우여곡절 끝에 해태(현 KIA) 유니폼을 입고 하반기 데뷔전을 가졌다. 그러니 모든 야구팬들의 이목이 대구야구장으로 집결될 수밖에.

선동열의 공은 그때까지 봐오던 투수들과 차원이 달랐다. 한국 최고의 좌완 투수라던 김일융조차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김일융이 미들급 펀치라면 선동열은 헤비급이었다. 체급 자체가 틀렸다. '돌직구'라는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

7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하던 선동열이 8회 갑자기 흔들렸다. 위기관리 능력은 하루아침에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제아무리 선동열이라도 신인은 역시 신인이었다. 선동열은 8회에만 5실점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박승호에게 맞은 솔로 홈런. 선동열은 볼카운트 1-2까지 잘 몰고 갔다. 4구째 바깥쪽 직구를 던지다 좌타자 박승호에게 백스크린을 맞히는 홈런을 허용했다. 자신의 프로 인생 첫 피홈런.

선동열은 한국 무대서 통산 367경기 1647이닝을 던져 28개의 홈런밖에 내주지 않았다. 319이닝동안 무홈런 행진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에게서 첫 홈런을 뽑아낸 박승호는 6년 후인 1991년 7월 14일 선동열에게서 두번째 홈런을 기록했다. 국내 프로야구에서 선동열에게서 3개 이상의 홈런을 때린 타자는 아무도 없다.

"볼카운트가 불리해 빠른 공 하나만 노리고 있었다. 여러 구종을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으면 선동열 공을 칠 수 없다. 바깥쪽 공을 찍어쳤는데 운좋게 넘어갔다." 박승호의 회상이다. 삼성, KIA, NC, 두산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던 박승호는 최고의 좌타자 타격코치로 손꼽힌다.

데뷔 첫해 선동열은 꽤 고전했다. 그런데도 1.70의 평균자책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2년차엔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0점대 평균자책점(0.99)을 기록했다. 선동열은 MVP 세 차례, 평균자책점 8회, 골든글러브 6회, 146승40패 통산 평균자책점 1.20을 남겼다.

선동열은 1987년 5월 16일 최동원과 영화 같은(실제로 '퍼펙트 게임'이라는 이름의 영화로 제작) 연장 15회 완투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국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투수였다.

선동열은 199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38세이브로 일본프로야구 타이기록을 세웠다.


일본 프로야구 팬들은 아직도 선동열을 강속구와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던지는 괴물투수로 기억하고 있다.

texan509@fnnews.com 성일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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