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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하의 본초여담] 아교로 안족(雁足)을 붙여 놓고 〇〇〇를 타다

정명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1.27 06:00

수정 2024.01.27 06:00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조선후기때 신윤복이 그린 ‘탄금(彈琴)’을 보면 한 여인이 거문고의 뒤편 위쪽에 있는 줄감개를 돌려 조율을 하고 있다. 동시에 거문고 줄을 받치고 있는 안족(雁足)을 움직여서 음을 조절할 수 있다.
조선후기때 신윤복이 그린 ‘탄금(彈琴)’을 보면 한 여인이 거문고의 뒤편 위쪽에 있는 줄감개를 돌려 조율을 하고 있다. 동시에 거문고 줄을 받치고 있는 안족(雁足)을 움직여서 음을 조절할 수 있다.


먼 옛날 어떤 젊은 남성이 4~5일 동안 열병을 앓더니 갑자기 윗옷을 벗어 버린 채 온 동네를 이리저리 달리며 다녔다.
그러다가 담벼락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알 수 없는 소리를 쉴 새 없이 지껄여댔다.

그러고는 길거리에서는 신분이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맞닥뜨리는 무작정 손가락질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집에서는 집안 살림을 몽둥이로 두드려서 조각조각 부숴버렸다. 그 사내의 이러한 미친 듯한 행동은 밤이 되면 더욱 심했다. 사내의 가족은 한 명의에게 진료를 부탁했다.

명의는 진찰을 해 보더니 “내가 생각건대, 이것은 광증(狂症)이오. 원인을 보아하니 며칠동안 열병을 앓으면서 열독(熱毒)이 위(胃)에 쌓여 모조리 심(心)에 들어가 양기가 지나치게 극심해져 음기가 갑자기 허해진 탓입니다.”라고 했다.

그러고서는 즉시 삼황석고탕(三黃石膏湯) 2첩을 처방해서 복용하게 했다. 그랬더니 병 기운이 이내 없어지고 열이 내리고 제반 증상이 가라지는 듯했다.

삼황석고탕은 화열(火熱)이나 심한 열로 번조(煩燥)가 있는 것이나 삼초(三焦)의 화를 두루 치료하는 황련해독탕(黃連解毒湯)을 기본방으로 하고 있다. 황연해독탕은 황련, 황금, 황백, 치자로 구성된 처방으로 제반 염증성 질환, 염증성 장질환, 피부질환, 광증, 분노조절장애 등에도 활용된다. 삼황석고탕은 여기에 담두시, 석고, 마황을 가한 처방이다.

명의는 사내에게 말하기를 “자네의 증상은 지금 완화가 되었지만 조리를 잘못하면 반드시 재발할 것이니 이어서 양격산(凉膈散) 2~3첩을 써서 육경(六經)에 남아 있는 열을 물리쳐야 재발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네.”라고 당부했다.

양격산은 흉격에 쌓인 열을 제거하는 처방으로 열독을 치료하는 명방이다. 그러나 그 사내는 명의의 말을 듣지 않고 처방을 이어서 복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음식을 조절하지 않고 이것저것 먹어대고 멋대로 지내더니 과연 3~4일이 지나자 다시 심한 열감을 호소하면서 답답해하고 가슴이 그득하고 변이 나오지 않는 등 이전의 증세가 다시 나타났다.

사내는 명의에게 다시 와서 “저를 구해주십시오. 의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다시 재발한 것 같습니다. 양격산인가 뭔가 하는 처방을 다시 해 주시면 이제 잘 복용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명의는 다시 진맥을 해 보고서는 자못 심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자네가 내 말을 따르지 않아 이런 흉악한 병증이 다시 재발하였으니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의 잘못이겠는가?”라고 했다.

그러자 사내는 “아니 처방을 못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저를 한번 살려 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명의는 “내가 언제 처방을 못하겠다고 했는가? 다만 양격산 증이 아니라는 것 뿐이거늘, 지금 병증은 그 때의 상황과는 다르니 어떻게 그 당시의 약을 동일하게 쓸 수 있겠는가? 좀더 약성이 강한 처방을 해야하겠네.”라고 했다.

그리고서는 즉시 대승기탕(大承氣湯)에 황련 1돈을 더한 것을 몇첩 지어 주었다. 대승기탕은 이열증(裏熱症)으로 열이 심하고 아주 실하며 배가 아주 더부룩한 경우를 치료할 때는 급하게 설사를 시켜서 치료할 때 쓰는 처방으로 하법(下法) 처방 중에 가장 센 처방이다.

대승기탕은 대황, 후박, 지실, 망초로 구성되어 있는데, 약성이 강해서 자칫 적응증이 아닌 환자에게 잘못 처방하면 복통, 설사로 고생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 임상에서는 대승기탕보다 약성이 부드럽고 위장에 부담이 적은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을 사용한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대승기탕 처방을 먹고 나더니 하루 이틀 심하게 설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는 땀이 많이 나면서 열이 내리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과 광증(狂症)도 풀렸다. 명의가 사내의 광증을 치료해서 완치했다는 소문이 났다.

그러자 한 의원이 명의를 찾아와 물었다. “그 환자의 광증은 어떤 이치로 치료하신 겁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명의는 “의원님은 그 이치를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체로 위(胃)로 옮겨간 열독이 심장으로 타고 올라가 양이 왕성해져 음을 막게 된 경우에는 삼황석고탕(三黃石膏湯)이 아니면 없앨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끝에 다시 재발한 경우는 진액(津液)이 아직 회복되지 않고 기혈이 여전히 공허한 상태에서 급하게 음식을 이것저것 많이 먹어서 그 빈틈을 타고 사열(邪熱)이 들어와 위(胃)가 말라 변이 건조하고 소갈이 나며 가슴이 답답하고 그득해진 것이니, 이때는 양격산으로 병을 치기에는 약합니다. 이 경우는 대승기탕(大承氣湯)이 아니면 씻어 없앨 수 없고, 또 황련이 아니면 심흉(心胸)에 틀어막힌 화를 쓸어내리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그 의원이 다시 묻기를 “대승기탕은 재발한 증세에 너무 센 것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 이미 한차례 병세가 잡혀서 수그러들었을텐데 어찌 약성이 강한 대승기탕을 처방하느냐는 질문이다.

그러나 명의는 “병을 치료하는 약석(藥石)은 각각 두드러진 특징이 있고 또한 병은 정해진 곳이 있으니 약을 쓸 때는 처방에만 얽매여서는 안 되고 증상에 맞으면 언제라도 쓸 수 있소이다. 마치 약은 쓰는 것은 전쟁에서 병사를 부리는 것과 같으니, 당신은 한나라 때 장수인 한신(韓信)이 홀로 배수진(背水陣)을 펼친 것을 알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의원은 당황해하면서 물었다. “한신의 배수진이라니요? 그것이 처방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명의는 “진법(陣法)에는 강을 앞에 두고 산을 뒤로 해서 진지를 구축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신은 그 반대로 강을 뒤로한 채 배수진을 치고 전투에 임해서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진법의 내용이 의서에 적인 처방대로만 치료하는 것이라면 한신의 배수진은 처방에 얽매이지 않고서 치료에 임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했다.

의원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은 “선생님은 약을 쓰는 것도 잘할 뿐 아니라 또한 병법에도 능통하시군요!”라고 했다.

그러나 명의는 “아~ 이 무슨 과분한 말씀이십니까! 나는 재질이 우둔하고 배움에도 어리석어 대략 내경에 있는 뜻을 들어 말한 것일 뿐입니다. 실로 갈고 닦아 궁구했던 것이 아니어서 부끄럽습니다.”라고 하면서 겸손해했다.

명의는 이어서 “말씀드렸다시피 처방에 있어서 이처럼 융통성이 중요합니다. 무릇 치료를 함에 있어서 기존의 의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처방만을 고집하면 안되겠습니다. 한 처방만을 떠올린다면 교주고슬(膠柱鼓瑟)과 다를 바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교주고슬(膠柱鼓瑟) 이야기는 사기(史記)에 나온다. 옛날에 조나라와 진나라가 전쟁을 하는데, 진나라 간첩이 ‘진나라에서 조괄을 장수로 쓸까봐서 두렵다.’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그런데 사실 조괄은 그의 아버지가 전해준 병서만 읽었지 전쟁의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전시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을 할 줄 몰랐다. 사실 진나라 입장에서는 조괄이 장수로 나온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 조나라 신하가 왕에게 “왕께서 조괄의 명성만 듣고서 그를 장수로 쓰신다면 이것은 마치 안족(雁足)을 아교로 붙여 놓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상소했다.

거문고 줄을 받치는 안족을 아교로 붙여 놓으면 안족을 움직일 수 없어서 음을 조절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왕은 결국 조괄을 장수로 불러내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는 경우에 교주고슬(膠柱鼓瑟)이라고 한다. 안족을 붙여 놓고 거문고를 타는 것처럼 융통성이 없다면 전쟁에서는 지는 것이고 환자를 치료할 때라면 치료에 실패할 것이다.

* 제목의 〇〇〇는 거문고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우잠잡저(愚岑雜著)> 熱毒狂症. 男子熱病四五日, 棄衣而走, 登高而歌, 言語不避, 尊卑逢着, 輒摳罵詈, 而家庄房撻, 片片破毁, 夜尤甚劇. 余意熱毒傳胃, 幷入於心, 陽氣亢極, 陰氣暴虛所致也, 卽投三黃石羔湯二貼, 病氣乃已, 熱退身凉. 余曰, "若不善將息, 必復作起, 須用凉膈天水散二三貼, 以退六經之餘熱, 俾無再復之蔽." 彼不信不用. 果越三四日, 食飮不節之致, 壯熱胸滿便閉, 前症更作, 來訢求濟, 余曰, "汝不信吾言, 致此凶証再復, 孰怨誰尤乎? 今則異於向者, 安得用其時藥乎?" 卽製大承氣湯, 加黃連一戔, 則大便通泄, 大汗解矣. (열독으로 생긴 광증. 어떤 남성이 4~5일 동안 열병을 앓아 옷을 벗어 버린 채 달리기도 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쉴 새 없이 지껄여대고 신분이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맞닥뜨리는 사람에게 대뜸 욕설을 퍼붓고 집안 살림을 몽둥이로 두드려서 조각조각 부수고 하였는데 밤이 되면 더욱 심하였다. 나는 열독이 위에 옮겨가 모조리 심에 들어가 양기가 지나치게 극심해져 음기가 갑자기 허해진 탓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삼황석고탕 2첩을 투약하였더니 병 기운이 이내 없어지고 열이 내리고 몸이 시원해졌다. 내가 말하기를 “조리를 잘못하면 반드시 재발할 것이니 양격천수산 2~3첩을 써서 육경에 남아 있는 열을 물리쳐야 재발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요.”하였는데 그 사람이 내 말을 따르지 않고 쓰지 않았다. 과연 3~4일 지나 음식을 조절하여 먹지 않은 탓에 심한 열이 나고 가슴이 그득하고 변이 나오지 않는 등 앞전의 증세가 다시 일어났다. 내게 와서 구제해 주십사하기에 “당신이 내 말을 따르지 않아 이런 흉악한 병증이 다시 재발하였으니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의 잘못인가? 지금 상황은 그 때의 상황과는 다르니 어떻게 그 당시의 약을 쓸 수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대승기탕에 황련 1돈을 더한 것을 지어 주었더니 설사가 나고 땀이 많이 나면서 풀렸다.)
<사기(史記)> 廉頗藺相如列傳. 後四年, 趙惠文王卒, 子孝成王立. 七年, 秦與趙兵相距長平, 時趙奢已死, 而藺相如病甐, 趙使廉頗將攻秦, 秦數敗趙軍, 趙軍固壁不戰. 秦數挑戰, 廉頗不肯. 趙王信秦之閒. 秦之閒言曰:秦之所惡, 獨畏馬服君趙奢之子趙括為將耳. 趙王因以括為將, 代廉頗. 藺相如曰:王以名使括, 若膠柱而鼓瑟耳. 括徒能讀其父書傳, 不知合變也. 趙王不聽, 遂將之. (염파인상여열전. 사년 후 조나라 혜문왕이 죽고 그 아들 효성왕이 즉위하였다. 효성왕 7년, 진나라와 조나라의 군사가 장평에서 대치하였는데, 이 때 조사는 이미 죽었고 인상여는 병이 위독하였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수로 삼아 진군을 치게 하였는데, 진군이 조군을 여러번 격파하였으나 조군은 보루의 벽을 견고하게 쌓고 싸우려 하지 않았으며 진군이 자주 도전하였지만 염파는 응하지 않았다. 조나라 효성황이 진나라 간첩의 말을 들었는데, 진나라 간첩이 수문을 퍼뜨리기를 ‘진나라가 꺼리는 바가 있으니 오로지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을 장수로 삼을까봐 두려워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오왕이 이 때문에 조괄을 장수로 삼아 염파를 대신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인상여가 말하기를 ‘왕께서는 명성만 듣고 조괄을 쓰려고 하시는데, 이는 안족을 아교로 붙여 놓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저 아버지가 전해준 병서를 읽었을 뿐, 상황에 맞추어 임기응변을 할지 모릅니다.’하며 말렸다.
그러나 조왕은 이를 듣지 않고 기어이 조괄을 장수로 삼았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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