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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의 기술빅뱅] 도시바 패착의 순간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12.18 18:26

수정 2023.12.18 18:46

기술발명 수혜 못누리고
원전 실패는 분식회계로
日정부 굴욕협상도 큰짐
최진숙 논설위원
최진숙 논설위원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여겼으나 몰락으로 치달은 많고 많은 일본 전자기업 중 최고가 도시바다. 샤프나 산요, NEC, 후지쓰 등 거물기업들도 비슷한 시기에 쇠락의 길을 갔으나 실패의 스케일이나 파장 면에서 도시바가 단연 우위에 있다.

일본의 천재 발명가 다나카 히사시게가 1875년 설립한 '다나카 제조소'가 도시바의 뿌리다. 150년 가까이 버텨온 이 기업이 20일 상장폐지된다. 막대한 경영손실을 수습하지 못해 결국 도쿄증시에서 사라지게 됐다. 1949년 상장돼 70여년 시총 상단을 차지했던 도시바는 일본 재계의 심장으로 통했다.
전기밥솥, 선풍기, 냉장고, 세탁기 국산 1호를 만든 일본 신문명의 요람이었던 곳. 절정기 1980년대엔 세계 첫 노트북 등 눈이 번쩍 뜨일 발명품으로 세계 시장의 허를 찔렀다.

영원할 것만 같던 도시바 제국의 몰락 징조가 보인 것도 실은 그때부터였다. 돌이킬 수 없는 도시바 참패의 길목에 어른거리는 얼굴이 비운의 괴짜 발명가 마쓰오카 후지오다. 도시바가 보유한 세계 최초 플래시메모리와 낸드플래시메모리 기술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런데도 그는 밤새 연구하고 낮에 잠을 자는 기행에 한직으로 밀려난다.

도시바는 당시 회사 주력이었던 D램 개발에 여념이 없었다. 밖으로는 D램 가격을 폭락시켜 미국을 상대로 한 반도체 치킨게임에 올인하고 있었다. 앞으로 모든 정보가 플래시메모리에 담길 것이라는 마쓰오카의 주장엔 관심이 없었다. 급기야 낸드플래시 기술을 삼성전자에 헐값으로 넘긴다. 그때가 1992년이다. 반도체 출사표를 던졌으나 치킨게임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삼성이 강력한 신흥주자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시름시름 침몰하기 시작한 거함 도시바에 직격탄이 된 것은 원전이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니시다 아쓰토시 전 회장이다. 도쿄대 법학석사 출신인 그는 전후 유명 정치논객들과 어울리며 필력을 날렸다. 이란에서 온 여자 유학생을 이란까지 쫓아가 결혼에 성공한 열정과 끈기의 소유자였다. 그는 혁명 전 이란에 남아 아내가 근무하던 공장에 현지 채용됐다. 그곳이 도시바였다. 1975년 일본 본사로 넘어와 30년 만에 사장, 그로부터 4년 뒤 회장까지 올랐고 회장에서 물러나서도 권한을 놓지 않았던 숨은 권력자가 그였다.

니시다는 2006년 미국 원전 설계업체 웨스팅하우스(WH)를 시가보다 3배나 비싸게 샀다. 제대로 된 시장조사도 없었다. 도시바는 이때부터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니시다가 자신의 후임에 원자력 한우물만 파온 사사키 노리오를 지명한 것도 결정적 패착이었다. 사사키는 완고하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사키가 그린 원전의 꿈은 대단했다. 하지만 이내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터졌고, 그 후 천문학적 손실이 난다. 그런데도 회계장부는 멀쩡했다. 거대한 분식회계 전모는 2015년에야 드러났다. 니시다와 후임 두 명의 사장 재임 7년 동안 자행된 분식회계 규모가 2248억엔이었다. 세계를 제패했던 '기술의 도시바'는 그렇게 시장을 배신했다.

오만과 아집, 극한의 관료주의가 도시바 비극을 낳았다. 도시바의 참패는 그렇다고 개별 기업의 실패로만 볼 일도 아니다. 헤이세이 시대(1989~2019) 몰락한 기라성 같은 기업들에 비슷한 대목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특정 기술에 대한 지나친 맹신, 그로 인해 미래 비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헤이세이 잃어버린 30년, 요시미 슌야')는 지적을 피해가지 못한다. 우왕좌왕했던 일본 정부의 과오도 말할 것 없다. 굴욕적인 미일 반도체협정과 플라자합의가 일본 침몰을 재촉했다.

기술에서 이기고 비즈니스와 협상에서 대패한 일본 IT기업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이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복기하며 재기를 다지고 있지만 현재 판세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100년 만의 기술 대변혁기다. 누군가 새 역사를 쓸 수 있다.
우리가 느긋하게 웃고 있을 때는 결코 아닐 것이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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