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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 칼럼] 공수처의 존재 이유

노주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12.11 18:03

수정 2023.12.11 18:03

출범 3년, 5전 5패 성적
'빈손으로 사는 곳' 조롱
2기 수뇌부에 명운 걸려
노주석 논설고문
노주석 논설고문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은 영빈관인 승지원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걸어놓고 뜻을 새겼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글귀를 무척 좋아해서 170점 넘게 직접 썼다고 한다. 후계자 이건희 회장도 늘 가까이 두고 새겼다는 후문이다.

공수처(公搜處)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라는 무시무시한 수사기관의 줄임말인데, 요즘 시중에서는 빈손으로 사는 곳(空手處)이라는 비아냥거리는 약자가 회자되고 있다. 출범 3년을 코앞에 두고 바닥을 기는 공수처의 처지를 나타낸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 검찰 견제, 성역 없는 수사, 부패척결을 위해 호기롭게 출발한 공수처가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게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공직사회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조직으로 치부됐던 공수처가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유 몇 가지를 조목조목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후임 공수처장에 대한 인선이 기관 존속 여부를 가를 것이라는 추측이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의 피해자이자 수혜자이기도 한 윤석열 대통령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 대선 당시 공수처 폐지를 언급하기도 했던 윤 대통령은 예상과 달리 국회에 차기 공수처장 지명절차를 의뢰했다.

리더십 부재에 따른 처참한 성적표는 공수처의 민낯이다. 판사 출신 처장과 차장의 무능이 구속영장 5건 청구에 '5전 5패'를 기록하게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연평균 예산 152억원을 쓰면서 구속영장 발부 0건, 직접 기소 3건, 공소제기 요구 5건이 공수처가 남긴 부끄러운 3년의 기록이다.

분란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최근 소속 부장검사 한 명이 '정치적 편향과 인사 전횡'을 주장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부당한 지시와 무원칙·무기준 인사발령 사례까지 폭로했다. '코미디 같은 일'이고, '총체적 난국'이라고 표현했다. 처장은 감찰을 지시하고, 차장은 개인 자격으로 다른 수사기관에 고소한다고 한다.

콩가루 집안의 전형이다. 원년 멤버 검사 13명 중 11명이 사표를 내고 떠났다니 알 만하다. 오로지 검찰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급하게 만들다 보니 조직 운영 등을 규정한 법령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인력·예산 부족이 애매모호한 기관 위상을 낳았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 3개를 합친 것보다 작은 미니 조직으로 제대로 된 수사가 가능했겠나.

우려대로 정치적 중립이 흔들렸다. 야당 대선 후보였던 윤 대통령 잡기에 힘을 쏟고, 문재인 대통령의 대학 동문인 이성윤 전 중앙지검장을 처장 관용차로 '황제 에스코트'했다. 민간인·정치인 사찰 논란을 일으켰다. 수사 대상에 따라 기소권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갈려 혼선을 빚었다. 차라리 기소권을 내려놓고 수사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차기 공수처장이 갖춰야 할 덕목은 풍부한 수사경력과 통솔력을 꼽을 수 있다. 현재 8명이 심사대상에 올랐다. 하나같이 판검사 출신이다. 문제는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능력을 갖춘 인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모두가 기피하는 인기 없는 기관이 돼버린 것이다. 2기 처장 후보자 선정 및 청문회 절차가 기한 안에 마무리되지 않으면 가뜩이나 위태위태한 조직이 수장 없이 표류할 수도 있다.

김진욱 공수처장은 지난 국감 때 "공수처가 일을 잘해서 고위공직자를 상대로 구속영장이 10건 발부되면 나라가 안 돌아갈 것"이라고 답변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표적감사' 의혹을 받는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이 지난 9일 공수처 출두조사를 받은 것처럼 공수처가 혁혁한 성과를 내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공직사회를 긴장하게 하는 '메기효과'를 낼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다.
깊은 산속의 호랑이는 보이지 않지만 포효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가. 공수처의 존폐는 2기 수장 인선에 달렸다.

joo@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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