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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의 기술빅뱅] 격동의 배터리 삼국지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10.11 18:19

수정 2023.10.11 18:19

토요타도 뚫은 진격의 韓
가성비 끝판왕 中의 역습
日은 전고체로 판 흔드나
[최진숙의 기술빅뱅] 격동의 배터리 삼국지
"쓸데없는 일을 잔뜩 하라. 그러면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이 말을 한 이는 일본 요시노 아키라 박사다. 그는 리튬이온전지를 발명한 공로로 독일계 미국인 존 구디너프, 영국 출신 스탠리 휘팅엄과 함께 2019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전기를 흐르게 하는 전지는 양극재, 음극재, 전해질로 구성된다. 전지의 크기, 성능, 수명, 안전성을 결정하는 것이 양극·음극 소재다. 리튬이온전지가 세상에 나오기 전 이차전지(배터리)는 납축전지, 니카드전지, 니켈수소전지가 주류였다.


요시노 박사가 처음부터 전지 전문가인 건 아니었다. 석유화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입사한 회사가 섬유업종의 아시하카세이다. 부속 연구소에 배치된 샐러리맨 과학자 요시노의 임무는 새로운 제품을 위한 시드기술을 찾아내는 것. 번번이 실패하다 입사 후 10년이 지난 1981년 기회를 잡는다. 플라스틱의 일종인 폴리아세틸렌에서 전기가 흐를 수 있다는 시리가와 히데키(2000년 노벨화학상 수상) 연구 결과가 그 무렵 나왔다. 이 폴리아세틸렌을 전지 음극 재료로 쓸 수 있겠다는 판단은 전적으로 요시노만의 생각이었다. 실험 결과 예감은 적중했다. 하지만 여기에 조합할 양극 재료를 찾는 일이 난제였다.

이듬해 연말, 그러니까 1982년 12월 연구소 대청소를 끝내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던 요시노는 책상 귀퉁이에 밀쳐놓은 문헌 하나를 집어든다. 당시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였던 구디너프가 엑손모빌 연구원 휘팅엄의 연구에 영감을 얻어 후속 작업을 한 논문이었다. 핵심은 코발트산리튬 화합물을 이차전지 양극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 적절한 음극 재료를 찾지 못했다는 내용도 쓰여 있었다. 요시노는 바로 시험전지 제작에 착수했다. 충전과 방전 모두가 완벽했다. 폴리아세틸렌 음극과 코발트산리튬 양극, 이것이 지금의 리튬이온전지 원형이다. 소형, 경량화, 전압, 에너지밀도에서 급격한 진화를 이뤄냈다. 그의 개발비화는 그가 쓴 '리튬이온전지 발명이야기'에 자세히 나온다.

요시노 박사가 길을 연 리튬이온전지 초반 시장은 일본 기업들의 독무대였다. 1991년 세계 최초로 양산을 시작한 소니, 2000년대 중반 돌풍을 일으킨 산요. 그 후 산요를 인수한 파나소닉이 세계 시장을 휘저었다. 이들에 의해 어깨에 두르던 숄더폰이 손으로 들 수 있는 폰이 됐다. 하지만 일본의 '배터리 천하'는 20년을 넘기지 못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전문가들이 꼽는 주요 패착은 스마트폰·전기차 시대의 폭발성을 내다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후발주자 한국·중국의 기업들이 '배터리 왕국' 일본을 뒷방으로 밀어냈다. 중국 정부는 서구를 이길 핵심 첨단기술로 일찌감치 배터리를 지목했다. 1999년 홍콩에 설립된 중국의 신생 배터리 업체 ATL은 애플의 아이폰에 배터리를 납품하면서 급성장했다. 2017년 ATL에서 분사한 CATL은 차량용 배터리에 집중했다. 세계 최대 전기차 중국 시장을 싹쓸이하면서 CATL은 점유율 세계 1위가 됐다. 가성비 뛰어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로 서구 시장 점유율도 높여가고 있으나 서방의 제재 수위가 변수다.

한국의 경우 배터리 산업에 과감히 베팅했다는 점에서 중국과 닮았지만 기업 주도로 성장했다는 점에선 중국과 차이가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중국을 제외한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 1위다. 서방이 인정하는 최고 기술은 LG엔솔에 있다는 뜻이다. LG엔솔은 최근 세계 완성차 1위 일본 토요타와 배터리 대규모 장기계약을 했다. 글로벌 완성차 톱 10개사 중 9개사가 LG엔솔 공급처가 됐다.

시장 판도를 보면 지금의 배터리는 한중 맞대결로 좁혀지지만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리튬이온전지를 넘어선 차세대 배터리 전쟁에 이미 세계 각국이 참전했다. 게임체인저로 떠오른 전고체전지를 비롯해 리튬황전지, 리튬공기전지 등이 연구대상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토요타의 전고체전지 기술이 가장 앞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가격 등 해결할 과제도 많겠으나 판을 바꾸는 힘이 기술에 있다는 건 너무나 분명하다.
배터리의 다음 미래는 누가 주도할 것인가. 지금 하기에 달려있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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