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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톡] 중국몽 건드린 한시 ‘분서갱’

정지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7.13 19:01

수정 2021.07.13 19:01

[차이나 톡] 중국몽 건드린 한시 ‘분서갱’
사회주의 중국이지만 만찬 분위기는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어느새 한 명씩 일어나 건배사나 소감을 말한다. 언젠가 내 순서가 됐을 때 한시를 읊은 적이 있다. 중국 소학교(초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외우게 하는 수준의 기본적인 한시다. 그러나 중국인들 반응은 의외였다. 옆 테이블 손님까지 일어나 박수를 친다.
어눌한 성조에 떠듬떠듬 애쓰는 모습이 감동스러웠나 보다.

호응이 있으니 재미도 붙었다. 이왕 한 거 몇 개 더 외워야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찾아봤다. 이백이나 두보의 시가 가장 많이 검색된다. 달과 호수, 술, 친구 등 멋들어진 시구가 가득하다.

하지만 눈을 사로잡는 것은 분서갱(焚書坑)이었다. 당나라 시인 장갈이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비판하려고 쓴 한시다.

분서갱유는 책을 불사르고 유학자를 구덩이에 산 채로 파묻는다는 뜻이다. 시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의학 등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태우게 하고, 불사의 꿈을 비판하던 유생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쉽게 말해 사상 탄압이다.

분서갱이 얼마 전 중국을 뜨겁게 달궜다. 불을 댕긴 것은 중국 최대 배달서비스 플랫폼 메이퇀의 최고경영자(CEO) 왕싱이다. 그는 지난 5월 초 느닷없이 중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분서갱 한시를 올렸다.

한 편의 시일 뿐이지만 파문을 몰고 왔다. 중국에서 이 한시는 체제 비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국공산당 100주년을 두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다. 100주년은 내년 10월 당대회까지 이어지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권력 장기화를 위한 징검다리 성격이 강하다. 중국 정부·관영 매체가 한마음으로 잔치를 준비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일개 CEO가 돌을 던지는 형국이 됐다.

당장 시장이 반응했다. 글이 게재된 후 홍콩 증시에서 메이퇀 주가가 폭락, 하루 만에 18조원이 사라졌다. 왕 CEO는 급히 수습에 나섰다. 해당 글은 정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 중국 인터넷업계의 치열한 경쟁에 관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국 정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사실상 핵심이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 국유 부동산개발업체 화위안그룹의 런즈창 전 회장, 밍톈그룹 전 회장 샤오젠화 등 당국 비판 후 몰락한 이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디디추싱은 네트워크 보안에 대한 셀프점검을 요구받고도 미국 증시 상장을 강행했다가 곤욕을 겪고 있다. 상장을 연기하라는 명령을 잘못 이해한 탓이다. 중국 지도부는 '괘씸죄'로 본 것 같다.

서기 627년.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 이세민은 독선과 아집을 부리지 않고 신하나 학자들의 간언(諫言)을 충실히 들었다. 그 덕분에 국력은 강성하고 경제적으론 번영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영화로운 시대 중 하나로 꼽힌다.
그의 연호인 정관을 따 '정관의 치(治)'라고도 부른다.

장갈의 분서갱은 이렇게 시작한다.
'책 태우던 연기가 꺼지자 황제의 천하통일 꿈도 사라졌다'. 중국공산당이 100주년 경축대회에서 천명한 것은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과 '중국몽' 실현이었다.

jjw@fnnews.com 정지우 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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