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순의 느린 걸음]

'정보 공유 않겠다고?'… 초심 잃은 블록체인 기업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0.15 16:35 수정 : 2019.10.15 16:35
"데이터를 특정 기관이나 기업의 서버에 보관하지 않고 네트워크 운용에 참여하는 노드에 분산 보관한다. 이 때문에 누군가 임의로 데이터를 변경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

데이터는 노드들에 투명하게 공개된다. 네트워크 운용은 노드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참여한 지분과 작업량이 명확하게 계산되고, 그에 맞춘 보상이 정확하게 이뤄진다."

2년여 전 처음 접한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다. 블록체인은 기술 이전에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기술을 활용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어 매력적이었다. 기업 운용에 적용하면 제품을 함께 만들어낸 협력업체들도 정당하게 보상을 받고, 주인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기술이 원론적으로 정확하게 적용되는 경우에 말이다. 그래서 나는 블록체인 기사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전 카카오의 블록체인 기술 자회사인 그라운드X가 개발 중이던 카카오톡용 디지털 자산관리 지갑 '클립' 출시가 연기됐다는 기사가 들어왔다.

그라운드X는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과 블록체인 기술을 결합해 블록체인 시장을 대중화하는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기대받는 기업이다. 메인넷 '클레이튼'을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라며 보란 듯이 세계 최다 판매고를 올리는 갤럭시노트와 함께 클레이튼폰도 만들어 판매 중이다.

그러니 그라운드X의 서비스나 상품은 기자들은 물론 블록체인 업계, 투자자에게도 늘 관심의 대상이다.

'클립' 출시가 늦어지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서비스 출시일정이 지연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다. 어쩌면 일정 조정 없이 한번에 나오는 신기술 서비스가 더 못미더울 수 있다. 더구나 '암호화폐 지갑'이라는 단어는 우리 정부가 금칙어처럼 점찍어 놓았으니 우여곡절이 없을 리 있겠는가. 기사는 그렇게 출고됐다.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클립' 출시 지연 공지를 받은 그라운드X 파트너들에게 "공지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는 일이 발생해 앞으로는 정보를 공유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당황스러운 반응이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블록체인의 원리인데 그것을 안하겠다고? 클립 출시 지연이 공개돼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나. 오히려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기다렸던 소비자나 시장 출시를 준비했던 파트너들이 널리 공유해야 할 정보 아닐까. 그런데 정보공개를 이유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뭘까. 파트너를 과거 대기업들의 하청업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블록체인 생태계는 신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산업을 일구는 스타트업들이 주축이다. 이들에게는 수년 안에 수천억원 매출을 올릴 유니콘의 기운도 느낀다. 또 그것이 한국 경제가 살길이다. 그래서 소비자도, 언론도 그들의 우군이다.

그런데 얼핏 이들 기업에서 1990년대 재벌의 냄새를 느낄 때가 있다. '정보는 공유하는 것이며, 누군가가 임의로 변경하면 안된다'는 블록체인의 철학과 기술을 문패로 내건 기업이 기술의 초심을 잃으면 소비자도, 관찰자도 그들의 우군일 이유가 적어진다.

cafe9@fnnews.com 이구순 블록포스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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