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에 담기고 코르크가 밀봉하니 와인 맛에 놀라운 변화가…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0.10 12:48 수정 : 2019.10.10 13:33

③와인 산업의 혁명적 사건들-유리병과 코르크



[파이낸셜뉴스] 지난 1992년 싱가포르 인근에서 120년 전에 침몰된 거대한 무역선 한 척이 인양됐습니다. 1872년 보르네오섬과 싱가포르 사이 바다를 건너다 태풍에 침몰된 이 배에는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들이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특히, 당대에 '왕들의 와인, 와인의 왕'으로 유명했던 생줄리앙에서 생산된 '샤또 그뤼오 라로즈(Chateau Gruyaud-Larose)'가 상자째 고스란히 보존된채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꺼내져 시음을 위해 전문가들이 와인을 맛보는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습니다.
엷은 오렌지 색을 띤 와인은 특유의 아로마를 유지하고 있었고 가죽, 담배, 낙엽, 커피 등 고상한 부케향까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모두를 놀래킨 이 와인들이 차가운 바닷속에서 120년동안이나 바닷물의 엄청난 압력을 견딘 것도, 바닷물의 유입없이 오히려 제대로 숙성이 진행진 것도 튼튼한 유리병과 코르크 덕분이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병의 모습. 보르도 와인은 껍질이 두꺼운 품종을 쓰기 때문에 와인 찌꺼기가 와인병의 어깨에서 걸리게 각이진 모습을 띠고 있다.


프랑스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와이너리인 르로아 와인병의 모습. 피노누아 와인은 찌꺼기가 적어 와인병의 어깨가 둥글게 처리돼 있다.


프랑스 알자스 지역에서 나오는 와인인 리슬링은 플루트 형태의 와인병 모습을 하고 있는게 특징이다.


와인 전문가들은 와인 산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3대 발명품으로 '유리병', '코르크', '이산화황'을 꼽습니다. 특히 유리병과 코르크는 병숙성을 가능하게 만들어 오늘날 우리가 10년, 20년 이상 잘 숙성된 고급 와인을 먹을 수 있게 해준 정말로 고마운 존재입니다.

프랑스 보르도의 그랑크뤼 클라세 와인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는 최소 10년 이상 숙성을 시켜야 제 맛을 내는 고급 와인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급 와인들이 우리 곁으로 찾아온 지는 불과 200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200여년 전 튼튼한 유리병과 코르크가 없던 시절에는 보르도 최고 등급 와인인 샤또 라피트 로췰드, 샤또 오브리옹 등도 그 해에 빚어 1년 안에 마시는 와인이었습니다. 와인은 공기와 접촉하게 되면 산화가 일어나고 그런 상태로 1~2년이 지나게 되면 식초로 변하게 되는데 이들 그랑크뤼 클라세 와인들의 품질은 그 당시에도 훌륭했지만 유리병과 코르크가 없어 공기를 차단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1800년대초까지만해도 와이너리는 와인을 빚어 일정기간 발효를 거친 후 오크통에 담아 네고시앙(도매상인)에게 바로 팔았습니다. 상인들은 오크통이나 암포라에 와인을 담아 그날 그날 덜어 팔았고 소비자들은 이를 주전자 같은 용기에 담아 가져갔습니다. 당연히 와인을 장기보관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800년대 들면서 와인이 튼튼한 유리병에 담기고 코르크가 유리병을 단단히 틀어막으면서 와인에 정말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화학 반응이 일어나 그동안 인류가 접하지 못한 새로운 맛을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와인이 병에 담겨 잘 보관되면 처음에 거칠고 뻑뻑했던 타닌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부드러워지고 세련된 질감으로 바뀌게 됩니다. 또 와인의 색깔도 진한 자줏빛에서 점차 오렌지 빛에 가깝게 엷어지고 발산되는 아로마도 스펙트럼처럼 여러가지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빈티지가 어린 와인에서는 신선한 포도맛이 강하지만 오래된 빈티지 와인에서는 각종 말린 과일이나 졸인 과일 맛이 나고 브로콜리나 아스파라거스 등의 채소향도 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1차 숙성때 배어든 오크향도 와인속에 훨씬 세련되게 녹아들어 와인이 더 우아해 집니다.

화이트 와인병(왼쪽)은 피노누아를 담는 병처럼 어깨가 둥글게 처리된게 특징이다.


■유리병과 코르크가 인류에게 준 놀라운 선물
와인이 본격적으로 유리병에 담긴 것은 1800년대 들어서였지만 유리병을 처음 만난 시기는 고대 로마시대였습니다. 다만 저장용도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하인들이 암포라 등에서 와인을 가져와 주인에게 따라주기 위해 담는 일종의 그릇같은 용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유리병은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와인을 담아 식탁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돼 왔습니다. 그마저도 워낙 제작비용이 비싼데다 너무 얇고 강도가 약해 살짝만 부딛혀도 깨져버려 대중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1634년 영국에서 지금처럼 밑이 넓고 유리가 두꺼우며 목이 가늘어 코르크로 밀봉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와인병이 등장합니다. 이후 1723년에는 프랑스 보르도의 오크통 제조업자인 피에르 미첼이 유리공장을 설립해 지금의 보르도 와인병과 비슷한 모양의 와인병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산업혁명을 통해 석탄을 이용하게 되면서 지금과 거의 같은 형태와 품질의 유리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죠. 가늘고 긴 모양을 하고 있어서 눕혀서 보관할 수 있는데다 세워서 박스채로 운반할 수 있어 너무 편했습니다. 이게 사실상 오늘날 와인병의 시조처럼 인정받는 모델입니다.

그런데 와인병의 용량은 왜 750ml가 기준으로 자리잡게 됐을까요. 프랑스 보르도 와인의 가장 큰 수출국은 영국이었는데 보르도 상인들은 225리터가 들어가는 나무통을 배에 싣는 대신 와인을 300개의 와인병에 나눠 6개들이 박스에 실어 보냈다고 합니다. 둥그런 나무통을 실어 운반하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실을 수 있고, 현지에서 보관이나 판매에도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용량 단위는 갤론(4.5리터)인데 이를 750ml 와인병 6개에 나눠담은 것입니다. 즉, 225리터짜리 나무통 와인으로 수출하는 대신 750ml 와인이 6개가 들어가는 50상자의 박스로 보낸 것이 그 유래가 된 것입니다. 와인병은 매그넘(1500ml), 제로보암(3000ml), 르호보암(4500ml) 등 큰 병도 있지만 기본 단위가 750ml가 이유입니다.

코르크 나무에서 코르크 재료인 표피를 벗겨내고 있는 모습.


■코르크만 봐도 고가 와인여부 금방 알아
와인산업에 있어 유리병 못지않게 큰 기여를 한 게 코르크입니다. 코르크는 와인병의 마개로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물에 닿아도 썩지 않으며 외부의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하는데다 수축력도 뛰어납니다. 온도 변화가 일어나도 코르크는 수축되거나 이완되지 않으며 불에 쉽게 타지도 않습니다. 앞서 말한 120년 동안 바닷속에서 와인이 살아있도록 해 준 것도 코르크가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코르크는 코르크 나무의 껍질로 만들어집니다. 참나무 계열의 나무로 주로 지중해 연안에서 많이 자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 산 코르크를 최고로 칩니다. 전세계 코르크의 절반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됩니다. 보통 수령이 20년 정도 되면 직경이 60㎝ 정도까지 자라는데 이때 껍질의 두께가 3~5㎝ 정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표피 15㎏을 채취하면 코르크 1000개 정도가 나옵니다. 껍질이 떨어져 나간 나무는 표피 성장기를 거쳐 10년 안팎 정도가 지나면 다시 채취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코르크만 봐도 와인의 가격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장기숙성형의 고가 와인일수록 좋은 코르크를 사용하고 코르크가 길기 때문입니다. 코르크는 38㎜, 44㎜, 49㎜, 53㎜ 등 4가지 종류로 생산됩니다. 좋은 코르크는 최소 25년 이상 품질을 유지하고 길게는 50년까지도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튼튼한 유리병과 코르크는 이처럼 우리에게 또 다른 선물을 가져다 줬습니다. 혹시 집에 오래된 빈티지 와인이 있다면 오늘 저녁 병숙성의 마술을 한번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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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와인 산업의 혁명적 사건들-샤또의 병입'이 이어집니다. 앞으로 김관웅 선임기자의 비즈니스 와인은 지면이 아닌 인터넷으로 계속 만나볼 수 있습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부동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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