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주영 칼럼]

디플레, 차라리 과잉대응이 낫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9.16 17:35 수정 : 2019.09.16 17:35

크루그먼, 한국에 위험 경고
KDI도 수요 위축을 지적해
여야, 정쟁 접고 경제 살피길

지난주 한국을 방문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교수(미국 뉴욕시립대)가 한국 경제의 디플레 위험에 대해 언급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주최한 'KSP(경제발전경험 공유사업) 컨퍼런스'에서다. 그 내용이 좀 이례적이다.

크루그먼 교수는 기조발제와 기자회견을 통해 "디플레가 한국 경제에 들러붙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과감하고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구체적 정책대안으로 재정확대를 주문했다. 경제학자들이 정부에 재정확대를 제안할 때는 대체로 정형화된 모범답안이 있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분야에 재원을 집중하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이 상례다. 재원의 효율성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루그먼 교수의 처방은 달랐다. "단기부양에 주력하라"고 했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으니 우선적으로 재정을 풀고 봐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크루그먼 교수는 한국 경제에 디플레나 디플레에 준하는 경제위기가 임박했다고 보는 것 같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에 경제위기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한국 경제에는 최근 심상치 않은 조짐 하나가 불거졌다. 8월 소비자물가가 53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0.04%)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은 "디플레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정부도 "공급측 요인으로 인한 일시적 하락"이라고 설명했다. 디플레가 되려면 수요위축과 물가하락이 맞물려야 하는데 아직까지 수요는 건재하다는 설명이었다. 8월 한달 물가만 보고 당장 디플레가 올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정부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찜찜하다. '53년 만에 처음'이 주는 압박감이 크다. 그런데 국책연구기관인 KDI가 정부와는 다른 설명을 내놓았다. 지난 8일 발간된 '경제동향' 9월호에서 "최근 우리 경제는 대내외 수요가 위축되며 전반적으로 부진한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수요위축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소비는 투자·수출과 함께 수요를 구성하는 3대 요소다. 투자와 수출은 이미 상당기간 감소세를 보였다. 그럼에도 그동안에는 소비가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어 수요위축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7월부터 소비재 품목에서 판매 감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디플레는 수요위축과 물가하락이 장기간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그중에도 수요위축이 디플레의 본질이다. 물가하락은 수요가 위축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이나 1990년대 일본 경제에서 경험한 것처럼 수요위축의 함정에 한번 빠지면 경제는 거의 거덜난다. 디플레는 탈출구 없는 경제적 재앙과 같다.

최근 우리 경제상황은 지난해 9월 우리 사회를 두려움으로 몰아넣었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떠올려보게 한다. 당시 국내에 환자가 발생해 메르스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이낙연 국무총리가 긴급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했다. 이 총리는 이 자리에서 "늑장대응보다는 차라리 과잉대응을 하라"고 주문했다. 메르스 확산으로 인한 고통에 비하면 부작용이 있더라도 과잉대응을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경제에 관한 한 디플레는 메르스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다. 크루그먼 교수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디플레 위험이 있을 때는 신중한 기조가 위험을 키울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디플레야말로 늑장대응보다는 과잉대응이 백번 낫다. 위험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다. 정치권이 조국대전에 휩싸여 정쟁에 몰두하면 그 시기는 더 빨라질 것이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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