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칼럼]

한전의 이유 있는 반란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7.01 17:22 수정 : 2019.07.0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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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재정으로 푸는게 순리

공기업 한국전력이 감히 정부에 어깃장을 놓았다. 정부는 7~8월 전기료를 깎아주려 한다. 저소득층 냉방복지를 위해서다. 그 덤터기를 한전에 씌우려 했다.
정부가 당최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건 아니다. 정부는 한전 지분을 51% 넘게 갖고 있다. 주주권을 행사했을 뿐이라고 우기면 반박이 쉽지 않다.

그런데도 한전 이사회는 정부안에 한차례 퇴짜(6월 21일)를 놓았다. 정부보다 시장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한전 소액주주들은 배임을 경고했다. 한전은 올 1·4분기 영업적자만 6300억원에 이른다. 이런 회사가 3000억원 가까운 손해를 감수하면 배임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동안 숱한 경영자들이 배임으로 곤욕을 치렀다. 한전 이사회, 특히 사외이사들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퇴짜를 놓은 지 1주일 만에 한전은 정부안을 수용했다. 하지만 조건을 걸었다. 한전은 그 내용을 '주택용 누진제 및 전기요금 체계 개편 관련사항'이란 제목으로 1일 시장에 공시했다. 정부가 딴소리 못하도록 못을 박은 셈이다. 그 가운데 "전기요금과 에너지복지를 분리하고, 복지는 요금체계 밖에서 별도로 시행한다"는 대목이 눈에 확 들어온다.

시장이 할 일이 있고, 정부가 할 일이 따로 있다. 문재인정부는 자꾸 국가가 할 일을 시장에 떠넘기려 든다. 정부 지분이 높다지만 한전은 엄연한 상장사다. 전기료를 강제로 내리면 선량한 소액주주들의 주머니를 터는 격이다. 저소득층 에너지복지는 나랏돈으로 지원하는 게 맞다. 이사회의 반기는 시장이 정부에 보내는 경고장이다.

최저임금 정책도 마찬가지다. 2년 새 30% 오른 부담을 자영업자가 죄다 짊어졌다. 정부가 근로복지로 풀어야 할 일을 시장에 넘겼다. 정통파 경제학자인 그레고리 맨큐 교수(하버드대)는 "빈곤층을 지원하려면 근로장려세제(EITC)가 최저임금보다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고용주는 빈곤층을 점점 고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세계경제의 맥을 짚다'·사공일 엮음). EITC는 정부가 저소득 근로층에 주는 일종의 근로장려금이다.

얼마 전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트랙터 기업에 농부의 일자리가 사라진 책임까지 묻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실업자 농부를 돕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정부 몫이라는 얘기다. 그 대신 기업은 세금을 낸다. 정부는 바로 그 세금으로 농부를 지원한다. 세금의 쓰임새는 실업수당이 될 수도 있고, 직업교육비가 될 수도 있다.

북유럽 복지국가 스웨덴은 시장과 정부의 역할분담이 환상적이다. 기업은 시장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대신 더 많은 세금을 낸다. 정부는 그 세금으로 저소득층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 장하준 교수(케임브리지대)는 "스웨덴 정치권에선 기업이 투자 많이 하고, 일자리 많이 늘리고, 세금 많이 내면 되지 많이 가진 건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이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2018년 12월 9일 중앙일보 인터뷰). 스웨덴 모델은 기업이 가진 효용을 극대화한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주 기자들 앞에서 '사실이 바뀌면 내 마음도 바뀐다'는 영국 경제학자 존 케인스의 말을 인용했다. 유연한 대응을 강조한 말로 풀이된다. 바라건대 앞으론 정부가 불쑥불쑥 시장에 끼어들지 않도록 김 실장이 힘을 썼으면 한다. 스웨덴 사례에서 보듯, 시장에 자유를 주면서도 얼마든지 시장실패를 보완할 수 있다. 정부가 할 일과 기업이 할 일, 업무분장만 잘해도 능률이 쑥 오른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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