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영 칼럼]

개헌, 숙의민주주의가 답이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4.11 17:11 수정 : 2018.04.11 17:11

탈원전 공론화가 좋은 선례..이번엔 여야가 국회 안에서 머리 맞대고 해법 찾아가길



여야의 개헌 대치전선이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는 지난달 20일부터 대통령 발의 개헌안 내용을 사흘 연속 발표했다. 이에 맞서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지난 4일 자체 개헌안을 내놨다. 청와대 개헌안 철회를 전제로 여당 안을 내놓으라고도 요구했다.
장군멍군식 마찰음만 요란할 뿐 진도는 안 나가는 형국이다.

이는 여야가 궁극적 개헌 방향을 놓고 딴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안의 주메뉴는 지역분권과 토지공개념을 비롯한 경제민주화 조항 확대다. 반면 한국당 안은 분권형 대통령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야당 측은 청와대 안을 사회주의 헌법 시도로, 여권은 야당 안을 변형된 내각제 기도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렇게 차려진 개헌 밥상이라면 여야가 서로 난감할 듯싶다. 이솝의 우화처럼 음식을 피차 먹기 힘든 그릇에 담아 권하는 꼴이니….

여야는 1987년에 만든 현행 헌법을 손봐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제왕적 대통령제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음을 잘 알고 있을 법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등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을 보면서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공히 개헌 공약을 제시했을 것이다.

다만 개헌해야 한다는 총론엔 동의하지만 각론에서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 정치권의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봐야 한다. '숙의'(熟議)란 공적 이슈를 놓고 '일방적 주장 대신 경청하면서 합의를 일구는 과정'이다. 민주주의를 진화론적 관점으로 보면 가장 소망스러운 단계이지만, 도달하기 쉽진 않다.

그러나 그 외에 무슨 대안이 있겠나. 어차피 과거 사사오입 개헌 같은 날치기 처리는 여소야대의 현행 의석 분포나 높아진 국민의 의식 수준을 감안하며 불가능하다. 일방적 처리가 설령 가능하더라도 결과는 불행할 것이다. 독이 있는 나무는 독이 든 열매를 맺는다고 봐야 한다. 독수독과(毒樹毒果) 이론은 형사범죄 판결에서뿐만 아니라 개헌 때도 적용돼야 마땅하다. 여야 합의 없이 일방적 국민투표로 통과된 유신헌법도 끝내 헌정사의 비극을 부르지 않았나.

물론 숙의민주주의는 오랜 의회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영국에서도 완벽히 뿌리 내리진 못했다. 반론과 재반론, 제안과 설복이 교직되는 과정에서 상대의 의견이 맞을 수 있다는 겸허한 자세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해 '신고리 원전 공론화위원회'는 숙의민주주의의 한국적 모범사례다. 5.6호기 건설은 재개하되, 점진적으로 원전 의존을 줄이자는 결론은 '신의 한 수'였다. 안전성에 대한 과도한 의구심에 기반한 정부의 탈원전 드라이브에도, 그 반대편 원전 경제성 만능 주장에도 휘둘리지 않으면서….

최근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청와대 개헌안을 보이콧 중인 한국당 안에 반영된 내각제적 요소를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에 빗댔다. 하지만 여권도 이참에 권력분산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거스르는 개헌안은 국민의 박수 속에 처리하기 힘든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설사 일방적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돼지가 진주목걸이를 매단 격일 듯싶다.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민주공화정을 운용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정치권이라면 겉으로만 지고지선해 보이는 헌법을 만든들 개 발에 편자(쇠 말굽)를 단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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