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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1) 한국 연극계 거목 임영웅 연출가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8.30 17:17

수정 2015.08.30 17:17

호랑이 연출가, 임영웅
호랑이라던 거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손은 따뜻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국내 무대에 처음 올리며 세계 연극판까지 뒤흔들었던 그다. '동양의 베니 굿맨'이라 불리던 아버지, 연극을 좋아하셨던 할머니. 그 밑에서 자연스럽게 연극인생이 시작됐다.

연출가에게 배우란?
배우는 자신의 생각을 표출해주는 존재다. 배고픈 시절 배우들을 위해 남겨놓은 생과자를 스텝들이 먹어버리자 노발대발했던 일화로 유명하다. 그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하지만 다 집합시켰지. 내 밑에서 뭘 배웠느냐고 악을 썼어요."

쉽지만 어려운 연극 철학
좋은 연극은 관객들이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연극이란다. 연극은 아무나 할수 없지만, 좋아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했다. 거장의 철학은 거창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연극연출가 임영웅은 "관객들이 '나는 잘살고 있나, 이렇게 사는 게 좋은 거구나' 생각하고 삶을 좀 더 바르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주는 연극이 좋은 연극"이라고 말했다. 사진=김범석 기자
연극연출가 임영웅은 "관객들이 '나는 잘살고 있나, 이렇게 사는 게 좋은 거구나' 생각하고 삶을 좀 더 바르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주는 연극이 좋은 연극"이라고 말했다. 사진=김범석 기자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역작이다. 무대 상연을 목적으로 하는 희곡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드문 일. 작품에 등장하는 두 남자가 하염없이 기다리는 '고도'는 누구인가. 수십년간 수많은 해답을 구하는 연극인, 관객과 함께 부조리극의 대표작으로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노벨상을 받은 이듬해 이 작품을 정식으로 국내 초연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람이 지금 한국 연극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연극연출가 임영웅(79)이다. 임 연출의 '고도'는 부조리 연극의 쉬운 해석을 제시했다는 평가와 함께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89년 한국 극단 최초로 프랑스 아비뇽축제에 참가한 이후 아일랜드, 일본, 폴란드에 잇따라 초청되며 한국 연극의 지평을 넓혔다. 그의 '고도'는 2000여회 이상 무대에 올라 50만여명의 관객들을 만났고 13번의 연극상을 수상했다. 임 연출이 창단한 산울림극단은 아서 밀러의 '비쉬에서 일어난 일',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피터 셰퍼의 '블랙코미디', 조해일의 '건강진단' 등 현대극의 문제작들을 공연했고 안톤 체호프, 헨리크 입센, 장 콕토 등 영미와 유럽은 물론 브라질, 칠레, 호주, 폴란드, 러시아의 대표적 현대연극들을 소개해왔다.

연출 인생 60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꾸준히 수작을 올리고 있는 그에게 '거장'의 칭호가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지난 20일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으로 그런 그를 만나러 간다니, 숨이 살짝 가빠왔다.

무얼 기대했을까. 지팡이 하나에 노구를 의지하고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여느 백발의 노인과 다르지 않았다. '호랑이 연출'로 유명했다는 말이 막연한 환상을 만들었다. 만나자마자 호탕한 목소리로 악수를 청할 줄 알았다. 악수를 청하긴 했다. 보드라운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직한 목소리는 호랑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산울림소극장 무대에는 작은 테이블 위에 심벌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9월 1일부터 공연하는 연극 '챙!'을 위한 소품이었다. '챙!'은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타악기 중 하나인 심벌즈가 내는 소리다. 심벌즈는 오케스트라 연주곡에서 가장 비중이 작은 악기지만 연주해야 할 순간, 제대로 소리를 냈을 때 음악의 절정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저거 마지막에 딱 한 번밖에 안 쳐. 허허." 묻지도 않았는데, 객석에 앉자마자 임 연출은 반전 아닌 반전을 폭로하며 작품 얘기를 시작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는 사람만 존재가치가 있는 건 아니지 않나. 함께하는 작업에서는 아주 조그만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없으면 진행이 안돼요. 심벌즈는 그런 사람들을 상징해요."

연극은 비행기 사고로 실종된 서울그랜드심포니오케스트라의 심벌즈 연주자 함석진의 인생 얘기를 들려준다. 우회적 기법에 능한 극작가 이강백과 임 연출의 만남으로 지난해 초연 당시 화제가 됐다. 2인극이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모노드라마로 바뀌었다. "모노드라마가 어렵지. 그만큼 제대로 하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힘이 훨씬 커요."

임 연출은 오케스트라를 잘 안다. 어릴 때부터 음악과 친했다. 숙부가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 지휘자인 임원식이다.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에서 더 유명했던 재즈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동양의 베니 굿맨'으로 불렸다. 아버지쪽 형제들 모두 음악을 했다. 임 연출도 사실 숙부처럼 멋진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1) 한국 연극계 거목 임영웅 연출가


―음악을 하지 왜 연극을 했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밤낮 말씀하셨다. "너희 대(代)에는 음악 좀 하지 마라." 그래서 안 했다. 연극을 하게 된 건 영화와 연극을 좋아했던 할머니의 영향이 크다. 할아버지는 그런 쪽에 취미가 없으셔서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일 때라 봐도 무슨 말인지 몰랐다. 아이스크림, 과자 얻어먹는 재미에 잘 따라 다녔다.

―연극하는 건 반대 안 하셨나.

▲반대할 겨를도 없이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세 살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전혀 없었고 아버지도 열세살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무릎에 앉혀서 밥도 먹여주고 나를 아주 귀여워해주셨다.

부모님도 없고 형제도 없는 어린 영웅은 음악회, 영화관, 전시회에 다니느라 외로울 겨를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연극반을 했다. 3학년을 다니던 중 6·25전쟁이 나서 충청남도로 피란을 가게 됐다. '놀 것 볼 것 부족하던' 당시에는 학예회가 엄청난 행사였는데 그걸 못하게 생긴 것이다. 그런데 부산에서는 피란 간 애들도 학교를 다니고 학예회도 한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보고는 부산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의 학예회 열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피란 중에도 어떻게 학예회를 할 생각을 했나.

▲모르겠다. 그냥 하고 싶었다. 못할 게 뭐가 있나 싶었다. 다들 '미친놈'이라고 했다. 교장이 어디 한번 해보라고 했다. 지원금을 못주니 못할 줄 알았던 것 같다. 우리 학교 출신이던 재무부 장관한테 가서 대뜸 기부금을 내놓으라고 했다. 선뜻 내주더라. 부산 영도극장에서 '여로의 끝'이라는 연극을 했다. 기획, 제작, 주연을 다 했다. 전쟁터에서 싹튼 사나이들의 우정 얘기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자연스럽게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연출로 정식 데뷔한 건 1955년 제1회 전국 중·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였다. 모교 후배들을 데리고 '사육신'을 공연해 상을 휩쓸었다. 이후 대학 은사인 김규대 선생 밑에서 일하며 무대 연출의 기초를 닦았다. 김규대 선생이 신협(신극협의회)에서 데뷔한 덕에 이해랑, 유치진 등 정통 연극인들에게 배움을 얻었다.

―연출을 어떻게 배웠나.

▲구체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가르쳐 주신 건 없다. 그냥 보면서 배웠다. 기본적으로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극론을 따랐다. 연극인들에게 성경 같은 책이다. 당시엔 연극 이론이나 연출법을 정리한 책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일본에서 나온 책들이 좀 있어서 그걸 봤다. 어릴 때부터 일본어로 된 세계문학전집을 읽었기 때문에 일본어가 능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 본격적인 활동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돈을 벌면서 연출 공부에도 도움이 될 일, 문화부 기자를 결심했다. 공연, 영화는 많이 보겠다 싶었다. 입사 면접에서 "문화부 기자 아니면 못한다"고 천명을 했다. "그때 문화부는 정치부나 사회부에서 사고 친 기자들이 귀향가는 동네였어요. 아니면 문학 하는 사람들이 글 쓰는 곳이었지. 그러니 얘는 뭔가, 다들 황당해했지."

신문사를 여러 번 옮겨다녔고 방송국까지 진출했다. 동아방송과 KBS의 드라마 PD로 일하면서 무대 연출을 계속하는 '이중생활'을 했다. 예그린악단에서 한국 최초의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1966년)의 연출을 맡게 된 게 그 즈음이었고 3년 뒤엔 '고도를 기다리며'의 역사적인 국내 초연이 이뤄졌다.

―'살짜기 옵서예'는 어떻게 탄생했나.

▲예그린악단 2기는 뮤지컬의 시대가 열릴 것을 예감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있었다. 지금 뮤지컬 오케스트라가 많아야 20명인데 그 당시 오케스트라, 합창단이 각각 60명씩이었다. 원하는 배우 전부 캐스팅할 수 있었다. 패티 김이 주인공 애랑 역을 맡았다. 대성황이었다.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1) 한국 연극계 거목 임영웅 연출가


―'고도를 기다리며'는 왜 하게 됐나.

▲다른 이유가 뭐가 있나. 작품이 좋아서 했다. 산울림극단 이름으로 1970년에 초연했는데 사실 한 해 전 신협 이름을 빌려서 먼저 공연했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함께 산울림극단이 탄생했다. 극단을 가지지 않고 자유롭게 연출 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엔 단체 등록을 해야 공연을 계속할 수 있었다.

―산울림극장이 한국 현대연극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들 한다.

▲그럴 수 있다. 우리는 흥행을 위한 연극을 한 적이 없다. 그래도 관객들이 많이 찾았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숱하게 해도 숱하게 관객이 많다. 관객의 취향에 맞추지 않아도 제대로 만들면 관객은 알아서 온다.

―산울림극장 개관 30주년을 맞은 소감은.

▲그런 거 없다. 숫자라는 건 의미가 없다. 지금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게 의미가 있는 거다.

임 연출은 얼마나 오래 했느냐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걸 평생 할 수 있어서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좋은 연극, 좋은 연출가는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옮겼다. 지난해 연출 인생 60주년, 올해 산울림소극장 30주년을 맞아 임 연출을 '스승'으로 둔 배우들이 잇따라 헌정 무대를 올리고 있는 참이었다.

―연출가에게 배우란 어떤 존재인가.

▲연출가의 생각을 밖으로 표출해 주는 것이 배우다. 소중한 존재다. 당연히 배우를 아낄 수밖에 없다.

배고픈 시절 배우들 먹으라고 남겨둔 생과자를 스태프들이 먹어버리자 노발대발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나는 절대 손을 안 댔어요. 그러면 스태프들도 못 먹지. 근데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그 새를 못 참고 먹어치운거야.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하지만 다 집합시켰지. 도대체 내 밑에서 뭘 배웠느냐고 악을 썼어요."

―좋은 연극이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연극은 사람 사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보는 사람들이 '나는 잘 살고 있나, 이렇게 사는 게 좋은 거구나' 생각하고 삶을 좀 더 바르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주는 연극이 좋은 연극이다.

'거장'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들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다. 실망보다는 위안이 됐다.
그는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연극이다. 좋아하면 하면 된다"고 했다.
"누가 나더러 한국 연극의 기틀을 세웠다고 합디다. 그럴 생각 전혀 없었어요. 평생 연극을 위해 살긴 했지만 그냥 좋아서 한 거지. 힘들 때도 있었지. 허나 누굴 탓해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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