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구본영 칼럼] 일제 만행의 피해자는 할머니들이다

구본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5.25 17:16

수정 2020.05.25 17:16

정의연 초심으로 돌아가야
조직보다 할머니 인권 먼저
애초의 발족취지 되살릴 때
[구본영 칼럼] 일제 만행의 피해자는 할머니들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지원단체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전 이사장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인의 후원금 유용 의혹 탓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30년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는 폭로가 도화선이 됐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25일 정의연을 겨냥한 이 할머니의 작심 회견이 떠올린 수주 변영로의 시 '논개'의 첫 구절이다. 수주는 임진왜란 당시 기녀 논개의 '충절의 순수함'을 절창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안고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남강으로 뛰어들었으리라.

1990년 정의연의 전신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출범 당시의 마음가짐도 그랬을 게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당한 참상을 알리고 묻혀 있던 일제의 죄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 어찌 쉬웠겠나. '거룩한 분노'나 '불붙는 정열' 없다면 말이다. 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위안부 인권문제를 공론화한 초심을 누가 부인할 텐가.

그런 순정도 30년 세월과 함께 바랜 것인가. 정의연의 회계장부에서 정부 지원금이나 민간 기부금을 불투명하게 처리한 흔적이 줄줄이 드러났다. 예컨대 2019년 한 상조회사에 1170만원을 지출했다고 썼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의 장례를 맡은 회사 측은 죄다 무료 봉사였다고 증언했다. 현대중공업이 기부한 돈으로 시가보다 비싸게 산 경기 안성의 위안부 쉼터를 돌연 싼값에 팔아치운 대목도 석연찮다.

물론 윤 전 이사장의 횡령·배임 여부를 기정사실화하긴 이르다. 다만 '불편한 진실'은 빙산의 일각인 양 드러났다. 어느 순간부터 일제 만행의 피해 당사자들이 주변부로 밀려났다는 사실이다. 할머니들 앞으로 들어온 후원금이 생뚱맞게 사드반대 모임이나 탈북자 북송 추진단체 등으로 새 나갔다니 말이다.

비정부기구(NGO)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본래 설립 취지를 떠나 조직 그 자체의 유지·확대가 최우선시되는 일이다. 이른바 '파킨슨의 법칙'이다. 정의연도 그런 징후가 일찌감치 감지됐다. 1995년 일본 측이 '아시아평화기금'이란 이름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때 정대협(정의연의 전신)은 "돈을 받으면 자발적으로 공창(公娼)이 된다"며 제동을 걸었다. 일본 정부에 대한 확실한 법적 단죄는 훗날로 넘기더라도 살아생전에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받고 싶었던 할머니들에겐 비수 같은 막말이었다.

그사이 일부 간부들은 여성부 장관(지은희)이나 다선 의원(이미경) 등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기도 했다. 정대협이 2004년 일부 할머니들로부터 "앵벌이로 배를 불려온 악당"이라는 비난을 들은 배경이다. 이번에 금배지를 단 윤 당선인과 함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요집회에 참석했던 이 할머니의 배신감도 같은 맥락일 듯싶다.

문재인정부는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약 100억원)으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2018년 해산했다. 하지만 이후 일본으로부터 단 한 발짝도 양보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재단 지원금을 받지 않기로 정의연·정부와 보조를 맞췄다가 세상을 뜬 할머니들에게는 이보다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나.

그렇다면 정의연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윤 당선인을 공천한 여권도 마찬가지다. 일제 만행의 피해자는 정의연이 아니라 어린 소녀로 전장에 끌려갔던 할머니들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해법이 나올 법하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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