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구순의 느린걸음

[이구순의 느린 걸음] 박사방, 진짜 가상자산 정책이 필요한 이유

이구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3.31 16:39

수정 2020.03.31 16:39

[이구순의 느린 걸음] 박사방, 진짜 가상자산 정책이 필요한 이유
텔레그램에 대화방을 만들고 성착취 범죄를 벌인 일명 '박사방' 사건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쁜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을까 싶어 화가 치민다. 또 우리 사회가 이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박사방'을 만들었다는 조 아무개는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수시로 "절대 안 잡힌다"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범죄에는 항상 목적이 있다고 하는데, 박사방은 돈을 목적으로 했다고 한다. 범죄 영상을 보여주는 대가로 텔레그램 방 입장료를 받았단다. 소유자와 거래내용 추적이 어렵다고 알려진 '모네로'라는 가상자산을 입장료로 받으면서 "안 잡힐 것"이라고 확신했던 듯하다.


이 대목에서 범죄자가 가상자산을 이용하면 범죄수익의 꼬리를 밟히지 않는다는 잘못된 확신을 갖도록 우리 사회가 여지를 준 것은 아닌지 돌아봤으면 한다.

올해 3월 국회가 '특정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면서 가상자산이라는 개념을 정의하기는 했지만, 지난 10년 이상 우리 정부와 수사당국은 가상자산을 '홍길동' 취급해 왔다. 분명 시장에서 가치저장의 수단, 화폐 대용으로 쓰이고 있는 가상자산을 모르는 체했다. 화폐는 아니라고 부인했고, 가치저장 수단에 대해서는 모르쇠 했다.

그러다보니 범죄와 관련된 가상자산을 낱낱이 추적해낼 기술적 연구도 활발하지 않았다. 해커에게 가상자산을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져도 수사당국은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수사하지 않은 채 그저 보관을 잘못한 주인 탓만 하도록 했다.

조 아무개는 이 대목을 노려 범죄를 실행할 유인을 얻은 것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 범죄로 번 돈을 들키지 않고 보관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니 범죄 욕구를 부추기지 않았겠는가 싶다.

한발 늦어버렸지만 박사방 사건 후에는 가상자산에 대한 촘촘한 정책을 만들었으면 한다. 사회적 합의를 거쳐 금융 프라이버시와 수사의 구분을 명확히 정했으면 한다.

암호화된 디지털자산 거래의 프라이버시는 어느 선까지 보호할 것인가. 정부와 수사당국은 어떤 범죄에 대해 어느 선에서 거래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는가. 은행이나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고객의 정보를 어느 선까지 요구하고 보관할 것인가. 어떤 절차에 의해 정부나 수사당국에 가상자산 거래정보를 제공할 것인가.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주요 회원국에 올 6월까지 이런 내용을 담은 법률을 만들도록 요구했다. 시간표에 맞춰 우리 정부도 특금법을 개정해 놨지만 정부와 수사당국, 산업계, 기술전문가들의 토론을 통한 사회적 합의 과정이 빠졌다.
그러니 범죄자들은 여전히 가상자산은 추적당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자신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지금부터라도 촘촘한 정책을 논의했으면 한다.
가상자산이라 하더라도 범죄와 관련되면 색출할 수 있는 근거와 기술을 만들고 공표하면 범죄욕구를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cafe9@fnnews.com 이구순 블록체인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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