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건·사고

멈춰선 수술실CCTV 입법... '권대희 사건' 유족 국민청원

김성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3.28 09:00

수정 2020.03.28 08:59

21일 오전 청와대 국민청원 올려
수술실CCTV 필요한 9가지 이유 적시
총선 뒤 국회서 관련법안 논의될지 관심
[파이낸셜뉴스] 2016년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받다 중태에 빠져 끝내 숨진 고 권대희씨 유족이 국민청원을 제기했다.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수술실CCTV 설치법을 조속히 입법해달라는 게 청원의 요지다.

수술실CCTV 설치 및 제공을 병원에 강제하지 않고 있는 현행법이 의료사고 피해 규명을 어렵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입법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본지 2019년 7월 13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술실 CCTV 설치’ 환자 기본권 지킴이인가, 의사 권리 침해인가’ 참조>

21일 오전 고 권대희씨 어머니 이나금씨가 정부 차원에서 수술실CCTV 입법을 요청하는 국민청원을 올렸다.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21일 오전 고 권대희씨 어머니 이나금씨가 정부 차원에서 수술실CCTV 입법을 요청하는 국민청원을 올렸다.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수술실CCTV 법제화 요구

2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故권대희 사건, 이래도 수술실CCTV 설치를 반대하시렵니까?’란 제목의 청원이 올라와 1600여명의 동의를 받았다.
권씨 어머니 이나금씨가 지난 21일 게시한 것으로, 지난해 국회에 발의된 의료법 개정안(일명 권대희법)을 정부 및 국회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권씨 어머니 이씨는 해당 청원에서 ‘우리국민, 대다수 사회적 약자는 스스로 일부 일탈한 의료진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는 수술실CCTV 설치가 필요악이 되었다’며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수술실CCTV 설치법, 일명 권대희법을 조속히 입법화 해 주실 것을 간곡히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이씨가 청원에서 강조한 수술실CCTV가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의료사고가 지나치게 전문적인 분야이고 △정보도 비대칭이며 △입증책임을 피해자가 져야 한다는 점. △모든 자료는 의료진이 가지고 있고 조작도 가능하며 △의료사고가 나면 인정하거나 원만하게 해결하려는 의지는 없고 법대로 하라고 하면서 최선을 다했으니 잘못이 없다고 한다는 것. △법대로 하면 대부분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 편을 들어주지 않고 △억울하게 사람이 죽어도 의사는 구속되지 않는다는 사실 △피해자가 소송에서 패소를 하면 병원 측 변호사 비용까지 책임져야 하는 구조 △한국이 의료사고에 대한 배상책임제도가 충실히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수술실CCTV 법제화는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도로 시도됐으나 상임위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멈춘 상태다. 담당 상임위인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이 아닌 국방위원장이 의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는 점은 현 국회의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진은 안규백 국회 국방위원장. fnDB
수술실CCTV 법제화는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도로 시도됐으나 상임위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멈춘 상태다. 담당 상임위인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이 아닌 국방위원장이 의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는 점은 현 국회의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진은 안규백 국회 국방위원장. fnDB

■의료사고는 기울어진 무대... "CCTV라도 있어야"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의료법 개정안은 의료기관 수술실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걸 골자로 한다. 의료사고가 발생한 경우 피해자 측이 의료진의 과실을 입증해야 하는 한국의 법체계 아래서 수술실CCTV라도 있어야 그나마 사실관계를 따져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기존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병원으로부터 의무기록지를 받고 의료진의 증언과 조합해 의료진의 과실을 입증해야 했다. 하지만 의료진의 증언이 있더라도 법정에서 번복되는 경우가 많고 의무기록지 역시 충실하게 적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과실을 입증하는 게 지나치게 어렵다는 평가가 많았다. 결국 의료분쟁조정중재원 등 감정기관에 감정을 요청해도 자료가 불충분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한 현행 의료법이 의사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고 병원 측이 우월한 자본과 정보를 바탕으로 법적대응에도 적극 나서는 경우가 많아 유족들은 수사 및 재판 단계에서 2차 피해를 겪는 사례도 많았다.

의료사고 완전 승소율이 1%도 채 되지 않는다는 통계는 의료사고 발생 시 병원과 피해자 측이 선 기울어진 무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의료사고 피해자와 마주하면 “법이 모두에게 평등하단 건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 “의사들은 꼭 법대로 하자고 한다” “우리는 가족을 잃고 매달려도 의사는 업무상 과실치사로 집행유예 나오니 절망적이다”같은 불만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의사협회의 강력한 입김은 병원과 의사의 의무를 강화하는 입법에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대희 사건을 계기로 발의된 의료법 개정안이 법안 접수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폐기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철회한 의원은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동섭·주승용 당시 바른미래당 의원, 이용주 당시 민주평화당 의원이었다.

안규백 의원은 다시 공동발의자 15명의 서명을 받아 법안을 다시 발의했지만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한 형편이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고 권대희씨를 앞에 두고 간호조무사들이 휴대폰을 보고 있다. 권씨 어머니 이나금씨는 CCTV와 의무기록지 교차 분석을 통해 당시 권씨 혈압이 80정도로 위험 상태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검찰은 다른 수술실에 있는 의사들이 권씨 수술실에 있던 간호조무사를 감독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쟁점이 된 의료법 위반 혐의를 불기소처분해 논란이 됐다. 권대희씨 유족 제공.
수술대에 누워있는 고 권대희씨를 앞에 두고 간호조무사들이 휴대폰을 보고 있다. 권씨 어머니 이나금씨는 CCTV와 의무기록지 교차 분석을 통해 당시 권씨 혈압이 80정도로 위험 상태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검찰은 다른 수술실에 있는 의사들이 권씨 수술실에 있던 간호조무사를 감독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쟁점이 된 의료법 위반 혐의를 불기소처분해 논란이 됐다. 권대희씨 유족 제공.

■본지 보도 이후 관심 급증... 시민 국민청원도 눈길

한편 스물다섯 경희대학교 학생이던 권대희씨는 지난 2016년 남몰래 찾은 서울 신사역 인근 한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받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권씨는 49일 간 연명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숨졌다. 사인은 저산소성 뇌손상이었다. 수술 중 발생한 과다출혈이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권씨가 아르바이트를 두세개씩 뛰고 식비까지 아껴가며 모은 650만원으로 수술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며 국민적인 분노가 들끓었다. 권씨가 해당 병원을 선택한 데는 14년 무사고 광고와 수술을 집도의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상담내용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권씨 사고 후 확보한 수술실 CCTV 영상엔 권씨를 수술한 원장이 다른 수술방에서 동시간대 수술을 집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등 의료진 과실을 입증할 수 있는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20대 젊은 의사도 원장 대신 지혈을 하다 수술실을 비웠고, 간호조무사들이 홀로 권씨와 남겨진 시간만 무려 30분을 넘겼다.

권씨가 3500cc의 피를 흘리는 동안 병실을 드나든 마취과 의사는 정확한 출혈량을 파악하지 못했다. 권씨는 이 병원에서 이송될 때까지도 혈액 수혈을 받지 못했다.

해당 병원은 권씨 사망 이후에도 ‘14년 무사고’ 광고를 홈페이지 등에 버젓이 내걸었다가 한 차례 처벌을 받았다. 1년 뒤 병원이 이를 재차 내걸어 다시 고발됐으나 성재호 검사가 이를 기소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본지 2월 8일. ‘[단독] 수술 환자 사망에도 '무사고' 광고 처벌 無... 짙어지는 검찰 '봐주기' 의혹’ 등 다수 보도 참조>

본지의 지난 보도들이 화제가 되며 해당 병원 홈페이지엔 시민들의 항의 게시글이 폭주했다. 현재 관련 게시글은 모두 삭제됐으며 상담게시판엔 글쓰기 기능이 사라진 상태다.

한편 권대희 사건 형사사건 두 번째 공판은 4월 7일 오후 2시 50분 서울중앙지법 522호 법정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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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한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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