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조중훈 창업주 탄생 100년…조원태 한진號 '수송보국' 철학 잇는다

뉴스1

입력 2020.03.12 06:05

수정 2020.03.12 11:18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한진그룹 제공)© 뉴스1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한진그룹 제공)© 뉴스1


조중훈 창업주. (한진그룹 제공)© 뉴스1
조중훈 창업주. (한진그룹 제공)© 뉴스1


1973년 5월16일 보잉 747점보기의 태평양 노선 취항식에서 조중훈(왼쪽 네번째)회장이 정재계 인사들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번째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 (한진그룹 제공)© 뉴스1
1973년 5월16일 보잉 747점보기의 태평양 노선 취항식에서 조중훈(왼쪽 네번째)회장이 정재계 인사들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번째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 (한진그룹 제공)© 뉴스1


조중훈 창업주가 제주 비행훈련원 방문시 조종훈련생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진그룹 제공)© 뉴스1
조중훈 창업주가 제주 비행훈련원 방문시 조종훈련생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진그룹 제공)© 뉴스1

(서울=뉴스1) 김상훈 기자 = 최근 한진그룹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외부세력과 손잡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조원태 회장과 다툼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수송보국(輸送報國)' 정신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수송으로 조국에 보답한다'는 뜻의 이 신념은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만든 한진그룹의 핵심 철학이다.
3세 경영의 막을 연 조원태 회장 역시 이같은 창업주의 경영철학을 핵심 가치로 삼고 새로운 100년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전략이다.

◇고난 속에서 넓힌 견문…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 설립

조중훈 창업주는 1920년 2월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조명희 선생과 태천즙 여사의 4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내던 중 가세가 기울자 일본으로 건너가 17세 어린 나이에 조선소 수습생으로 발탁된다. 교육을 마친 뒤에는 일본 화물선을 타고 상하이, 홍콩, 동남아 등 항해를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1942년 귀국한 조 창업주는 서울 효제동에 자동차 엔진 수리업체 이연공업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1943년 조선총독부가 모든 물자와 산업시설을 군수지원체제로 편입하면서 이연공업사 역시 2년동안 사업을 접게 된다.

1945년 광복을 맞자마자 조 창업주는 이연공업사 정리 보상금과 모아둔 돈으로 트럭 한대를 장만하고, 인천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한진'은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뜻으로 사업을 발전시켜 우리 민족을 잘살게 하겠다는 조 창업주의 신념을 반영했다.

사업 초기부터 조 창업주는 '신용'을 중요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상사는 사업 시작 5년만에 종업원 40여명, 트럭 30여대를 보유한 회사로 성장했다.

한국전쟁 발발로 한진상사는 큰 타격을 입기도 했지만 앞서 신용으로 맺은 투자자들 덕분에 무담보로 대출을 받는 등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또 국내 업체 중 최초로 미군 운송권도 따내면서 한진상사는 사업 시작 15년만인 1960년 500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연 220만달러의 외화를 버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땅에서 하늘로 사업 확장…'신용'의 힘으로 위기 극복

조 창업주는 하늘로 눈을 돌렸다. 수송보국의 꿈을 하늘에서 펼쳐보겠다는 의지에서다. 1960년 조 창업주는 4인승 세스나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또 주식회사 한국항공 설립 신고도 냈다. 하지만 당시 정부가 국영기업인 대한국민항공사(KNA)를 키우기 위해 외화를 몰아주는 등 전폭적 지원에 나서자 조 창업주는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항공사업의 꿈을 잠시 접어둔 사이 조 창업주는 대진해운, 한국공항, 한일개발 등을 잇달아 설립해 사세를 키우고 자본금을 모았다. 그러다 1969년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항공사업에 띄어들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조 창업주에게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라며 부탁한 것도 결심의 계기가 됐다.

하지만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1973년 중동전 발발로 항공유 가격이 4배 이상 치솟았기 때문이다. 연료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대한항공은 설립 4년만에 새로 들여온 점보 비행기를 담보로 내놔야 할 만큼 상황이 다급했다.

당장 5000만달러의 경영자금이 필요했던 조 창업주는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은행에 도움을 요청하고 업무상 인연을 맺은 로제 총제에게 보증을 부탁했다. 조 창업주 본인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 로제 총재는 흔쾌히 대출을 승인했다. 조 창업주가 사업초기부터 강조했던 신용에 대한 확신이 작용한 결과였다.

◇수송외길 걸어온 수송거목…국익을 위한 경영철학

조중훈 창업주의 발길은 바닷길까지 향했다. 1977년 조중훈 회장은 육해공 종합수송 그룹 완성을 위해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또 1989년에는 법정관리 절차를 밝고 있던 조선공사를 인수, 한진중공업도 출범했다.

조 창업주는 평소 '진정한 낚시꾼은 한 대의 낚시대로도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는 '낚싯대 경영론'에 따라 모르는 사업에 뛰어들어 확장을 거듭하는 방식의 무모한 행동을 자제했다. 그 결과 한진그룹은 수송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업만 운영하는 종합물류그룹으로 성장하게 됐다.

아울러 조 창업주는 기업은 반드시 '국민 경제와 조화'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운영해야 하고 눈앞의 이익보다는 국익을 위해 기업이 일정 부분의 손해도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부실 덩어리였던 대한항공공사 등 공기업을 인수하게 된 이유도 이와 같다.

또 조 창업주는 항공사 경영을 통해 쌓은 광범위한 국제 인맥을 활용해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등 우리나라의 경제 및 외교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기업이 사업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것 말고도 민간외교를 통해 국익에 일조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 창업주는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1968년 인하학원을 인수하고, 1979년에는 한국항공대학교를 인수해 시설의 확충과 교육의 질적 향상을 이끌었다. 조 창업주는 2002년 타계 전까지 사재 일부인 1000억원 가량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부했다.
그중 500억원은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 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 등 3곳에 배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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