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노무현의 용기 또는 지략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2.10 17:27

수정 2020.02.10 17:27

2003년 사스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상하이 3박4일 방문
박용만 "제노포비아는 안돼"
[곽인찬 칼럼] 노무현의 용기 또는 지략
세상이 어수선하면 꼭 음모론이 나온다. 검색창에서 일루미나티 예언카드를 치면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을 뒤에서 움직이는 비밀결사조직이 2001년 미국 9·11 테러, 2011년 일본 후쿠시마 대지진과 원전사고를 다 내다봤다는 것이다. 올 7~8월 도쿄에서 열리는 올림픽이 재앙이 될 거란 카드도 있다. 절정은 미국 워싱턴의 의사당처럼 생긴 건물 위로 박쥐가 날아다니는 카드다. 카드엔 'Plague of Demons'라고 써 있다.
악마의 전염병이란 뜻이다. 마침 중국 우한에 미국 의사당처럼 생긴, 짓다가 만 건물이 있다고 한다. 일루미나티 예언카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곧 우한폐렴을 예견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댄 브라운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인페르노'(2016년)엔 세계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야 인류가 행복해진다는 괴퍅한 억만장자 유전학자가 나온다. 그는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세균을 개발한다. 주인공 하바드대 교수(톰 행크스)와 세계보건기구(WHO) 요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 세균을 찾아 인류 멸망을 막는다는 게 줄거리다.

음모론을 전파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일루미나티 카드에 박쥐가 나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박쥐는 생김새부터 혐오감을 부른다. 나는 만화영화 속 배트맨 말고는 박쥐에 대해 호감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박쥐가 '악마의 전염병' 카드에 등장한 것은 적어도 나에겐 자연스럽다. 미 의사당처럼 생긴 건물이 우한에도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구글에서 돔(Dome)을 검색해 보라. 워싱턴 의사당처럼 생긴 건물은 세상에 차고 넘친다. 바티칸에 있는 베드로대성당도 닮은꼴이다.

지금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음모론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3년 2월에 취임한 노 대통령은 그해 7월에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5월)·일본(6월)·중국으로 이어지는 3강 외교의 종착점이다. 중국을 강타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는 7월 들어서야 가까스로 불길이 잡혔다. 사스로 모두 774명이 죽었고, 중국에서만 349명이 목숨을 잃었다. 몇 달 뒤로 미룬다고 중국이 외교적 결례라며 시비를 걸 사안도 아니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일정대로 갔다. 당시 후진타오 주석은 노 대통령을 극진히 맞았고 중국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우리 정부라고 왜 방중을 늦추자는 의견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이런 때에 방문을 하면 얼마나 반갑고 고마워하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방중에 앞서 후 주석에게 위로 전화를 하고 지원금 30만달러도 보냈다. 당시 국정홍보처가 낸 '전쟁은 잠그고 경제는 연다: 미·일·중 현장에서 본 노무현 외교'라는 3강 외교 결산 책자에 나오는 일화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지난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에 가까운 중국 기피나 거친 언어로 비난에 몰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한·중이) 인접한 공동체라는 생각을 갖고 이성적·합리적으로 대처해야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백번 옳은 얘기다. 싸움터에선 흥분하면 진다. 특히 상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일 땐 더 그렇다. 중국이, 중국사람이 예뻐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웃집에 불이 나면 일단 물 양동이를 들고 불부터 끄고 볼 일이다. 그래야 우리집으로 불이 옮겨붙지 않는다.
노무현·박용만 두 분처럼 멀리 보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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