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김대중'과 '2020년 안철수'의 새정치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1.18 08:30 수정 : 2020.01.18 08:30

DJ·安, 대선 2년 앞두고 정계복귀
총선서 '정치 저력' 시험대
DJ·安, '새정치' 강조
세력·정치지형·국민감정 큰 차이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국정치 이대로 좋은가? 미래 정책토론회'에서 안철수 전 의원의 영상메세지가 재생되고 있다. 뉴시스
[파이낸셜뉴스]안철수가 오는 19일 정계복귀를 선언한다. 21대 총선부터 '준연동형 비례제'가 도입되면서 안철수의 정치적 재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중도'와 '제3지대'를 표방해온 안철수가 준연동형제라는 정치적 파도 위에 올라타 국민의당 '돌풍'을 재현할 것이란 전망과 '미풍'에 그칠 것이란 비관적 예측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오는 2022년 예정된 '20대 대통령 선거'가 불과 2년여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안철수의 '정치 저력'도 시험대에 올랐다.


한편, 1992년 14대 대선 패배 직후 유학길에 올랐던 김대중도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15대 대선은 2년, 15대 총선은 약 1년 남은 시점이었다. 시기상으로 2020년 안철수의 정계복귀와 유사하다.

김대중과 안철수는 호남의 전폭적 지지와 국민적 사랑을 받았지만 선거에서 졌고, 외국을 전전하다 정계에 복귀했다는 유사점도 있다. 또 '새정치'라는 정치구호를 내걸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1995년 김대중과 2020년 안철수, 이들에겐 결정적 차이점이 존재한다.

지난 2017년 5월 8일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선후보가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지역 거점 유세를 마친 뒤 유권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하나. 세력
세력이 다르다. 김대중은 명실상부 '민주화의 역사' 그 자체였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앞장서고 국민이 피를 뿌리며 완성한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 자체로 김대중의 정치적 자산과 세력이 됐다.

김대중은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 냈지만 민주세력은 분열했고, 무릎 꿇었다. 김대중은 이 때 민주세력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는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김영삼에게 패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다 1994년 귀국해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조직했다.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동교동계의 막후로 활동하며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1995년 공식 정계복귀를 선언한 김대중은 '노욕이다', '거짓말을 했다'는 등 많은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1997년 대선에서 보란 듯이 승리하며 최초의 수평적·평화적 정권교체의 역사를 썼다.

김대중의 승리를 가능케 한 저력은 그를 뒷받침 하는 세력이 튼튼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한국 정치 최대 정파 중 하나로 자리잡은 '동교동계' 인사들이 건재했고 호남이라는 탄탄한 지역 기반이 있었다.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는 대선 1년 전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 '참패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79명의 당선자를 내며 원내 2당, 제1야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에 비해 안철수는 조금 더 복잡한 상황에 놓였다. 자신이 구심점 역할을 했던 국민의당은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대안신당으로 쪼개졌다. 최근 발표되는 여론 조사들을 보면 안철수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호남 민심도 구 국민의당계 정당보다 민주당에 더 많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 안철수는 정계복귀와 동시에 자신을 뒷받침할 세력을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정치적 과제를 안게 됐다.

1987년 9월8일 광주 북구 망월묘역을 찾은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이 5·18 광주항쟁 희생자 유가족들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뉴스1
■둘. 국민감정
김대중과 안철수를 대하는 국민감정도 큰 차이가 있다.

김대중은 명실상부한 호남의 맹주였다. 1987년 9월, 망월동 묘역을 찾은 김대중이 눈물을 쏟았다. 그가 아이처럼 잔뜩 얼굴을 찡그리며 오열하자 광주도 함께 울었다.

호남은 김대중을 '선생님'이라 칭하며 각별히 아꼈다. 그의 아들 김홍일·김홍업은 물론 영원한 책사 박지원 등 참모들을 국회로 보내며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사랑을 아낌 없이 드러냈다. 호남에게 김대중은 '미안함'이자 '고마움', '동지'이자 '연인'이었다.

호남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그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희생과 헌신을 높게 평가했다. 그런 이유로 국민들은 김대중의 정계은퇴 번복에 차가운 시선을 보내면서도 결국 그를 대통령에 밀어 올렸다.

안철수는 한 때 '청년멘토'로 불리며 신드롬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아름다운 양보'를 하며 단박에 대선 주자가 됐다. 20대 총선에선 거대양당을 불신했던 '중도, 제3지대' 표심과 호남의 압도적 지지를 끌어 모으며 '국민의당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새정치라는 환상적 구호와 선언에 매료됐던 국민들은, 시간이 지나자 냉정히 되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정치가 뭔데?'
안철수는 새정치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강병원 민주당 의원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안철수의) 새정치는 9년째 미궁에 빠져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안철수는 2017년 대선과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연패하며 상처를 입었다. 그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영상과 사진이 인터넷을 덮었다. 그로 인해 똑똑하고 깨끗하고 참신하고 순수했던 그의 이미지가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

안철수는 9년 전 처음 정치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그를 보며 느꼈던 국민들의 설레임과 기대감, 참신함에 기반한 애정을 되찾아야할 숙제를 짊어지고 있다.

■DJ '새정치' vs 安 '새정치'
김대중과 안철수는 모두 '새정치'라는 정치 구호를 내걸었다. 1995년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안철수는 '새정치'를 자신의 정치 아젠다로 제시했다.

김대중과 안철수는 그 정치적 스탠스에서도 일정부분 유사함을 보인다.

김대중은 처음 대통령 선거에 나왔던 1971년 '대중경제론'을 내세우며 진보적 색깔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1997년 대선에선 시장경제를 강화한 신대중경제론을 제시했고 김종필의 자민련과 선거 연대를 이루며 중도보수의 입지를 다졌다.

안철수 역시 스스로를 '중도'로 규정하며 개혁보수, 합리적 진보라면 언제든 함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실제 그는 유승민이 이끄는 바른정당과 호남이 주 지지기반이던 국민의당을 통합하며 '중도 세력화'에 나서기도 했다.

안철수는 오는 19일 귀국을 앞두고 입장문을 통해 "정치 바이러스를 잡겠다"며 굳은 의지를 다졌다. 어쩌면 그는 이미 역경과 패배를 딛고 승리한 김대중의 길을 걷고 싶어할지 모른다.

김대중과 안철수 사이엔 유사함도 있지만 큰 강이 존재한다. 안철수가 그 큰 강을 뛰어 넘을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juyong@fnnews.com 송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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