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화재현장의 모든것 보고 듣고 기록 "원인 샅샅이 밝혀 피해자 마음에 난 불 끕니다" [내일을 밝히는 사람들]

안태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1.15 17:11

수정 2020.01.15 18:39

화재조사관
신고 접수때부터 함께 현장 나가
틈만 나면 들어가 가연물 등 확인
진압 후엔 유독가스 위험 무릅쓰고
겨울엔 얼음판 된 바닥 깨가며 작업
퇴근후, 주말에도 큰불 터지면 출동
예방·대응 위한 활동에도 앞장
위험한 실험해가며 영상·논문 남겨
지난 2018년 11월 서울 종로구 관수동 청계천 인근 국일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화재조사관들이 고시원 내부에서 화재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서울소방재난본부 제공
지난 2018년 11월 서울 종로구 관수동 청계천 인근 국일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화재조사관들이 고시원 내부에서 화재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서울소방재난본부 제공

"소방관이 불을 끄듯이 우리들은 화재 피해자 마음에 난 불을 끕니다." 보통 소방관이라 하면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조하는 모습을 주로 떠올린다.
긴급환자를 응급처치하고 병원으로 안전하게 이송하는 업무도 일반 국민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만큼이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소방관들이 있다. 바로 '화재조사관'이다. 지난 8일 서울 중구 서울소방재난본부에서 화재조사를 맡고 있는 재난조사분석팀원들을 만나 화재조사관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본부에서만 10년 넘게 근무한 김정현 조사관은 "화재조사라고 하면 불이 다 진화된 다음 조사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장 인력들과 신고접수 단계부터 함께 출동해 화재 양상을 살핀다"고 운을 뗐다. 초기 화재 양상을 직접 확인하면 향후 원인 조사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목격자 진술을 청취하는 일도 그들의 몫이다. 목격자 설명 역시 원인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할 뿐 아니라 건물 내 인명정보나 화재 성격 등을 빠르게 알아내 현장지휘관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매우 중요해서다.

■화재 현장도 들어가는 화재조사관

종종 화재 진압 중에 현장에 직접 들어가기도 한다. 김 조사관은 "진화 활동을 할 때 잔불 정리를 위해 가구나 전자제품들을 뒤집어 엎고 이동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연물들의 배치를 미리 봐두는 것도 중요하다"며 "틈이 생기면 잠깐이라도 들어가서 보고 오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근무조건도 열악한 편이다. 화재가 진압된 현장에는 분진, 미세 유해물질들이 바닥에 가라 앉아있다. 그걸 다 파헤치면서 원인조사를 해야 한다. 유독물질들이 다시 공기 중에 날려 흡입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한겨울 화재조사는 더 힘들다. 추위는 그렇다치더라도 화재 진압에 사용된 물이 바닥에 고여 얼음판으로 변하는건 예사다. 직접 얼음을 깨면서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현재 서울 각 소방서에 6명씩 배치된 총 140여명의 화재조사관들이 2인 1조 3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서울본부에는 5명이 근무한다. 본부 조사관들은 평소 행정업무를 수행하다가 대형화재나 인명피해가 발생하면 즉시 출동한다. 작년에만 KT공동구 화재, 국일고시원 화재 등 60여건의 대형 사고에 출동했다. 2차 조사까지 더하면 120여건이다.

교대근무가 아니다 보니 서울본부 조사관들은 퇴근 후나 주말에 집에 있다가도 출동하는 일이 잦다. 일선 소방서 조사관들은 각자 업무시간에 맞춰 일정을 조율할 수 있지만 본부 조사관들은 그렇지 못한 셈이다. 이날 인터뷰에 참여한 4명의 조사관들 모두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다들 '사명감' 하나로 본부에 남아있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조사 결과 따라 책임소재 가려져

화재조사관의 사명감은 무거운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조사관의 조사 결과에 따라 책임소재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이영병 조사관은 "화재 한 건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법적으로 파생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며 "조사 결과로 인해 큰 비용을 물어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전했다.

2017년 1월 발생한 가락시장 화재가 대표적이다. 명절 연휴에 한 점포에서 불이나 인근 점포까지 화재가 번졌다. 다행히도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처음 불이 난 점포 주인이 다른 피해까지 물어주게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사결과 건물관리실에서 설치한 열선에서 불이 시작된 것을 확인했다. 가락시장 관리를 맡고 있는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로 책임이 넘어간 것이다. 이 조사관은 "바닥에 주로 불이 번져서 애를 먹었다. 결국 천장으로 지나가는 파이프에 감긴 열선에서 불이 시작된 것을 확인했다"며 "과학적인 조사 끝에 배상책임자가 바뀌면서 억울한 일을 막아주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특히 서울본부가 집중하는 분야는 '제조물 화재'다. 쉽게 말해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에서 불이 시작된 경우 제품 결함으로 화재가 촉발됐는지 여부를 가려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제품 결함으로 결론 나면 서울소방본부가 직접 제조사를 상대해 피해보상지원까지 연결해준다. 김정현 조사관은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혼자 대응하긴 어렵기 때문에 이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며 "아무래도 관에서 직접 나서는 터라 제조사들도 근거가 명확한 경우 대체적으로 보상을 해준다"고 귀띔했다. 작년에만 177건의 제조물 피해를 보상 안내했다.

서울소방재난본부 재난조사분석팀. 왼쪽부터 황영중, 김정현, 이영병, 진용기 조사관. 서울소방재난본부 제공
서울소방재난본부 재난조사분석팀. 왼쪽부터 황영중, 김정현, 이영병, 진용기 조사관. 서울소방재난본부 제공
■차량 리콜까지 이어진 제조물 조사

유사한 결함으로 인한 화재가 반복될 경우 대규모 리콜로 이어지기도 한다. 진용기 조사관이 직접 조사에 나섰던 그랜드 카니발 화재 사건이 그랬다. 유사한 시기에 동종 차량에서 잇따라 발생한 화재를 조사한 결과 에어컨에서 발생한 수분이 차량 내부 전기장치에 떨어진 것이 원인으로 확인됐다. 진 조사관은 동일한 사례 10여건의 제작결함을 조사기관에 제공했다. 결국 국토교통부는 2018년 6월 그랜드 카니발 21만2186대 리콜을 발표했다.

되레 제조사와 피해자의 상황이 뒤바뀐 경우도 있었다. 세탁기에서 발생한 화재였다. 이전에 유사한 사례가 몇 건 있는 탓에 제조사가 보상을 해주려는 찰나, 세탁기 내부에서 양초의 성분인 '파라핀'이 발견된 것을 단초로 사용자 과실을 밝혀냈다. 김 조사관은 "무조건 사용자 관점에서 조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 원인 규명을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소방본부는 '화재 실험'을 통해 국민들에게 올바른 행동요령을 홍보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문 닫고 대피하기'다. 만약 집안의 한 방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방문을 열어두고 대피하면 화재가 급격히 확산된다. 아파트, 다세대주택의 경우 연기가 계단 등을 타고 올라가 상층부 사람들의 대피 통로도 막아버린다. 반면 문을 닫고 대피하면 산소가 차단되기 때문에 화세가 죽어버린다는 게 조사관들의 설명이다.

■홍보 위해 위험한 실험도

이같은 이론을 시연하기 위해 2016년 강남 재개발 지역의 다세대주택에서 화재실험을 진행했다. 황영중 조사관이 발화지점으로 들어가 체험했다. 황 조사관은 "공기호흡기를 차고 있었는데도 대피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며 "까딱 잘못하면 위험할뻔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한 아파트에서 화재를 확인하러 갔던 경비원이 집 문을 열고 대피하는 바람에 화재가 확산된 사례가 있다. 반드시 문을 닫고 대피해야한다"고 당부했다.

이밖에도 에어컨 실외기, LPG 가스누출, 분진폭발, 백 드래프트 현상 등을 실험한 결과를 데이터와 영상 등으로 남겼고 논문으로도 작성됐다.

이들이 위험한 실험까지 해가며 홍보활동에 나서는 이유는 화재 조사를 나갔을 때 피해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소방기본법에 피난 과정, 사명경위를 조사하도록 돼 있다. 예방교육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이 조사관은 "조사하다보면 사망자들이 대피로를 찾다가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 행동과 경로가 보인다"며 "최근에 돌도 안 지난 아이가 화재로 사망했다. 엄마가 아이를 미처 구하지 못하고 나왔다. 침대에서 2m 떨어진 곳에서 아이가 발견됐다. 아이가 뜨거우니까 2m를 기어간 거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안타까워했다.

이같이 사망자 발생 경위와 화재 확산 이유를 밝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사한 패턴들이 발견됐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실험을 자진해서 계획하고 실시한 것이다.

서울소방만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하나 더 있다. 화재 피해자 중 사회적 약자인 경우 피해 복구도 돕는다. 김 조사관은 "서울시만의 피해복구 조례가 있다. 저소득층에 화재가 나면 기금을 조성해서 복구를 돕는다"며 "화재 잔존물을 직접 치워주고 사회복지 협의회 등과 연계해 준다"고 설명했다. 이영병 조사관은 화재조사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소방관들은 불을 끈다.
화재로 후속조치가 굉장히 많다. 화재 피해자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마음에 난 불을 꺼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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