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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여고생살해 누명 벗긴 변호사 "그의 진심 보였다"

뉴스1

입력 2019.10.24 18:06

수정 2019.10.24 18:06

1991년 1월25일 충북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 공사장에서 발생한 여고생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A씨(47).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A씨는 당시 경찰의 가혹행위와 폭행으로 자백했다고 주장했다. ©News1 박태성기자
1991년 1월25일 충북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 공사장에서 발생한 여고생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A씨(47).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A씨는 당시 경찰의 가혹행위와 폭행으로 자백했다고 주장했다. ©News1 박태성기자


1991년 1월 충북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 공사장에서 발생한 여고생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A씨(47)의 1심과 2심 재판에서 변호를 맡았던 김준환 변호사가 재판 기록을 살펴보고 있다. ©News1 박태성 기자
1991년 1월 충북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 공사장에서 발생한 여고생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A씨(47)의 1심과 2심 재판에서 변호를 맡았던 김준환 변호사가 재판 기록을 살펴보고 있다. ©News1 박태성 기자

(청주=뉴스1) 박태성 기자 = "경찰의 고문으로 자백을 했습니다."

1991년 발생한 '청주 가경동 여고생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검거돼 1·2심 재판 끝에 무죄를 선고받아 간신히 억울한 누명을 벗은 남자가 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 이춘재(56)의 자백 이후 모습을 드러낸 그는 "경찰의 가혹행위로 범행을 자백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청주 여고생 살인사건'은 1991년 1월26일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 공사장에서 박모양(당시 16세)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A씨(47)를 붙잡아 자백을 받아냈다. 고문과도 같은 강압 수사의 결과물이자 A씨에게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이다.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통인 그의 기억을 종합하면 경찰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수시로 폭행하거나 잠을 재우지 않았다.

쪼그려 앉은 자세로 무릎 뒤쪽에 봉을 걸어 거꾸로 매달아 얼굴에 적신 수건을 올리고 짬뽕 국물을 붓기도 했다.

현장검증이라고 다를리 없었다.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형사들이 미리 알려주고 각본(?)과 다른 행동은 직접 지시했다고 했다.

다행히 1심·2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A씨는 검찰이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면서 최종적으로 혐의를 벗었다.

1심 재판부는 수사기관에서 증거로 제출한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 등은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공판 과정에서 A씨가 진술이나 범행 재연의 상황을 모두 부인하는 점 등을 이유로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이 없다고 봤다.

또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오락가락했던 강도사건의 피해자이자 핵심 증인인 B씨의 진술과 증언 역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A씨를 직접 변호했던 김준환 변호사는 24일 뉴스1과 만나 "1991년 당시 A씨를 교도소에서 접견했을 때 그는 '경찰의 강압수사가 있었다'며 역울함을 호소했다"고 기억했다.

다음은 A씨의 변호를 맡았던 김 변호사와의 일문일답.

― 변호사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1989년부터 청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 A씨 사건을 기억하나.

▶ 오래되긴 했지만 당시 사건이 알려지고 나서 판결문 등을 확인했다.

― 사건은 어떻게 맡게 됐나.

▶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A씨의 어머니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아들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했다.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해 사건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접견 당시 A씨는 어땠나.

▶ 검찰 수사 이후 재판을 앞둔 시점에 교도소에서 처음 접견했다. A씨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자신의 의사표현을 강하게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조용히 억울하다고만 했다. 일반 사람이라면 펄쩍 뛰며 분노할 일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진심이 보였고 간절함도 느껴졌다.

― 경찰 수사에서 가혹행위 등 강압수사가 있었다고 했나.

▶ 고문에 대한 강한 의사표현은 없었다. A씨가 경찰에서 강압수사를 받았다고는 했다. 잠을 안 재웠다고 한 것 같다. 접견 과정에서 구타 흔적(상처)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재판에서도 이런 부분이 언급됐지만 상처 등 강압수사를 입증할 증거가 없었다.

― 자백 외 다른 증거가 있었나.

▶재판에서 A씨 자백 외에 제출된 증거가 있긴 했다. 현장에서 나왔다는 혈액형과 A씨의 혈액형이 일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강도사건 피해자의 목격 증언, 사건 당일 A씨의 옷과 신발에 흙이 묻어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이런 점으로 미뤄 수사기관에서는 A씨를 범인으로 의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당시 재판에서 A씨의 자백이 중요하게 다뤄진 이유는.

▶ 과학수사라는 게 전무한 시절이다. DNA 조사나 CCTV 등이 없었다. 살인사건에서 물적 증거 확보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자백이 매우 중요한 증거로 사용됐다.

― 1심 재판만 2년 정도 이어졌다. 다툼이 많았나.

▶ 법적 다툼이 많았다. 관련 감정서도 받아야 했고 재판이 오래 진행됐다. 2심으로 마무리됐다. 무죄가 나오면 검찰에서 대법원 상고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뚜렷한 증거와 입증 논리가 부족해 (검찰이) 상고를 포기한 게 아닌가 추정한다.

― 재판에서 어떤 주장을 했나.

▶ 시간이 갈수록 뚜렷해진 핵심 관련자의 일관성 없는 진술의 신빙성에 대해 주장했던 것 같다. 억울함을 주장하는 A씨의 자백 역시 증거로 채택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1심과 2심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 1심·2심 재판 모두 무죄 판단이 나왔다.

▶ 무죄가 맞다. 증거를 봐도 범인이 제3자일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A씨는 과거 경찰의 강압수사를 주장하며 사과를 원하고 있다. 법조인으로서 입장은.

▶ 강압수사가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맞다.
하지만 사실이라도 당시 수사관들이 인정하겠나.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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