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한국에선 작은 돈 1000원… 아프리카에선 생명을 구할 수 있어요"

권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1.15 17:04

수정 2018.11.15 18:12

[감동시리즈-우리함께] <15>10년째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김소은 서울여성의원 원장
김소은 서울여성의원 원장은 지난 2008년부터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돌며 의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의사가 됐다는 것에 감사했다"고 말했다.
김소은 서울여성의원 원장은 지난 2008년부터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돌며 의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의사가 됐다는 것에 감사했다"고 말했다.



"아기가/섬마섬마/일어서다가 넘어진다/넘어졌다가/일어선다/다시 넘어진다/오늘은 이토록 진지한 날…"(고은 '아기에 대하여' 중에서)

아이가 처음 홀로 서는 것만으로도 그날 하루는 금세 '진지한 날'이 돼버린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큰다.
매 순간이 놓칠 수 없이 소중한 이유다. 김소은 서울여성의원 원장(52·사진)도 늦둥이 딸 아이의 매 순간을 빠짐없이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의사를 보는 게 평생 소원'이라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절박함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김 원장은 돌을 맞은 딸 아이를 뒤로 하고 처음 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김 원장은 자신이 10년째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타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다.

김 원장은 1년에 한번, 여름에만 쉰다. 지난 2008년 이후 매년 의료봉사를 위해 여름휴가를 썼으니, 김 원장은 10년째 쉬지 못한 셈이다. 그 역시도 지칠 때가 있다. 매년 여름이 돌아오면 '이번에는 그냥 쉴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게다가 갈 때마다 수천만원은 우습게 든다. 비행기 값이며 약, 진료 장비 등 준비할 게 많아서다. 하지만 바로 앞 순서에서 진료가 끝나 아쉬워하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꼭 다시 오겠다"며 손가락을 건 뒤 돌려보낸 환자들이다. 김 원장은 "아무래도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제가 의사라는 게 처음으로 기뻤어요"

김 원장에게 아프리카는 말라리아, 황열병, 장티푸스 등 온갖 병이 득실대는 위험한 곳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시작하게 된 건 한 학생의 아프리카 봉사 후기를 듣고 나서다. 그 학생은 다니던 대학교를 그만두고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며 소위 '깡패'처럼 살았다. 길에서 아프리카 봉사 프로그램을 소개하던 대학생들이 그를 보고 움찔 피할 정도였다. 우연한 마주침은 그 학생을 아프리카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김 원장은 "봉사를 통해서 새 삶을 사는 신비한 변화를 나도 느끼고 싶었다"고 했다.

첫 의료봉사는 가나의 한 빈민촌에서 했다. 의료봉사 초보였던 김 원장은 현지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타이레놀 시럽병 하나와 아스피린 몇 개만 들고 간 그였다. 김 원장은 "맨발로 3~4시간 동안 걸어서 왔다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렸는데 나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된 상태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원장은 환자들에게 진단을 해주며 약을 가져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자 환자들은 "내 평생의 소원은 의사를 한번 만나보고라도 죽는 것이었다"며 김 원장을 되레 위로했다.

김 원장은 말했다. "적당히 누릴려고 의사가 됐어요.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의사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마음이 황폐했어요. 웬만한 일에는 울지도 않았죠. 다른 사람들한테 의사를 하라고 자신 있게 권하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처음 느꼈어요. 의사가 됐다는 게 정말 기쁜 일이었구나. 누군가가 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더라고요. 약을 받지 못해도 의사를 봤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어요."

■"머리카락보다 얇은 주사바늘이 안 들어가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지만 김 원장이 의료봉사를 시작했을 때의 아프리카는 참 열악했다. 온 가족이 에이즈에 걸려 다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광경도 여럿 봤다. 영양실조로 인한 탈수현상으로 김 원장을 찾은 어린아이들을 볼 때면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 가운데서도 김 원장은 토고에서 만난 '안토니오'라는 환자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태어난 지 3~4개월 무렵이었던 안토니오는 심각한 영양실조 때문에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링겔 하나만 꽂으면 살릴 수 있는데 혈관이 안 보이는 거예요. 20번이나 찔렀는데 안토니오는 울지도 않아요. 울 기력도 없고 아픔도 못 느끼는 거죠. 탈수가 되면 감각이 없으니까요. 발등에 있는 혈관을 겨우 찾았는데 주사바늘이 안 들어가더라고요. 머리카락보다 가는 24게이지의 주삿바늘이었는데도요. 겨우 찔러넣어 살렸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해요."

한번은 진료 도중 살기를 느낀 적도 있단다. 2010년 말라위 빈민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낡은 교회를 빌려 진료를 보는 와중에 강도행위를 하려는 조짐이 포착됐다. 김 원장은 "사람들이 너무 굶주리니까 살기가 느껴졌다"며 "약이 필요한 게 아니라 밥, 달러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했다. 봉사팀은 허겁지겁 짐을 챙겨 나와야 했다. 이 일로 빈민촌보다는 중심가 위주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김 원장은 걸을 기력이 없어 찾아올 수도 없는 빈민촌 환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김 원장은 매년 가는 아프리카에서 늘 배운다고 했다. 김 원장에 따르면 아프리카 난민들의 월평균 생활비는 300원이다. 1000원짜리 말라리아 약은 그들에게 세 달치 생활비와 맞먹는 엄청난 금액이다. 김 원장은 "한국에서는 1000원은 가치가 없다시피 한 돈인데 그들에겐 약을 사고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돈"이라며 느끼는 바가 많다고 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환자들은 봉사자들에게 옥수수가루라도 주려고 한단다.

■"아프리카에서 받은 사랑 나눠줄래요"

김 원장은 아프리카에서 배운 사랑과 행복을 주변에 나눠주고 싶다고 했다. 가장 가까이는 김 원장을 찾는 환자들에게다. 그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먹지 못하고 죽을병에 걸려서 힘들어 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어떤 관념 속에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며 "어머니가 되는 일이 위대하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깨우치고 행복하게 여길 수 있게끔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아프리카 봉사활동이 없었다면 이런 생각도 못했을 거란다.

지역사회 청소년들에게도 꿈을 심어주고 있다. "저는 청소년들에게 '배추벌레는 노력해서 나비가 되는 게 아니다'라고 꼭 말해줍니다. 배추벌레는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나비가 돼 창공을 날아요. 의사같은 경우 워낙 되기가 힘드니까 시작도 해보기 전에 지레 겁먹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전 그들에게 현재의 나를 보지 말고 이미 꿈을 이룬 나를 상상해보라고 해요." 그가 이야기했다. 그는 일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진로나 학업에 대해서 상담해주는 등 멘토 역할도 하고 있다.

김 원장은 앞으로도 꾸준히 아프리카에 갈 예정이다. 김 원장은 당당히 말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아프리카를 갈 거예요. 단 한명이라도 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면요. 의료봉사가 아니었다면 제 삶은 아마도 이렇게까지 풍요롭지 못했을 거예요."

김 원장은 아프리카 의료봉사 및 도서벽지 무료진료 등을 통해 국가와 지역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달 31일 한국여성단체협의회(회장 최금숙)가 수여하는 '용신봉사상'을 받았다. ktop@fnnews.com 권승현 기자사진=박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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