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대기업

[세계는 넓다. 김우중 영면]'세계 경영' 일군 김우중의 파란만장 83年

김규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2.10 15:13

수정 2019.12.10 15:38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밤 11시50분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 김 전 회장은 지난해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돼 귀국 후 아주대 병원에서 통원 진료를 받았으나 올 하반기쯤부터 입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며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차려진다. 사진은 고 김 전 회장 생전 모습. 사진=뉴스1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밤 11시50분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 김 전 회장은 지난해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돼 귀국 후 아주대 병원에서 통원 진료를 받았으나 올 하반기쯤부터 입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며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차려진다.
사진은 고 김 전 회장 생전 모습. 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지난 9일 저녁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80~90년대 "세계 경영"을 외치며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그는 1999년 대우 그룹이 완전히 해체될 때까지 20여년 동안 우리 경제의 시야를 해외로 넓히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81년 대우그룹 회장직을 맡은 이후 총 41개 계열사, 자산규모 국내 2위로 회사를 일궈냈다. 김우중 전 회장은 척박했던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하면서 대우를 신흥국 출신 중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키워냈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유명 저서를 남겼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10일 "알래스카에서 아프리카까지 구두와 서류가방만으로 세계 곳곳을 누볐던 그의 발걸음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할 것"이라며 "한국 경제가 어려운 때 그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내고 수년 간 해외 도피 생활을 하는 등 치욕의 세월도 보냈다. 김 전 회장의 83년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대한민국 창업 1세대
김우중 전 회장은 1936년 12월 대구에서 김용하와 전인항씨 사이의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인 김용하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구사범 은사였고, 이 인연이 김우중 전 회장의 사업에 도움이 된 것으로 재계에서는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지사였던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15세부터 소년가장으로 가족의 생계를 도맡았다. 휴전 후 상경해 경기중·고등학교를 거친 뒤 1956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1960년 무역회사 한성실업에 들어가며 사업에 처음 눈을 떴다. 그는 1963년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 직수출 계약을 따내며 재능을 보였다. 당시 김 전 회장은 싱가포르에서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면서 인도계 기업인을 설득, 당시 37만달러 가량의 생산 계약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1967년에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31세때였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 사업의 길을 걷던 김 전 회장은 해외 시장에 골몰했다. 대우실업은 창업 1년 만에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팔아 58만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인도네시아, 미국 등으로도 시장을 확장했다. 이듬해인 1969년엔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설립하기도 했다.

'대우 신화'를 쓰다
1970~1980년대 김 회장은 세계 시장을 주무대로 승승장구한다.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활짝 열며,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대우조선해양) 등 부실기업을 인수해 단기간에 경영정상화를 이뤄냈다.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기반을 다졌다. 무역업과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바탕으로 대우그룹은 삼성, 현대에 버금가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김 전 회장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1960년대 수출 진흥 정책과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등의 혜택을 크게 받는 시대적 운도 따랐다.

이를 토대로 1982년 무역·건설부문을 통합, ㈜대우를 설립한 김 전 회장은 재계 4위 그룹의 총수에 올랐다. 그는 세계 경영을 강조했다. 자동차·중공업·조선·전자·통신·정보시스템·금융·호텔·서비스 등 각종 산업을 토대로 해외 진출을 본격화했다. 특히 1989년 출간된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리는 등 그는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업인으로 평가됐다.

김 회장의 각종 어록도 회자됐다. 당시 "외국에 나가면 길바닥에 돈이 쫙 깔려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 돈을 언제 어떻게 거둬들이냐 하는 것이 문제지, 돈이 안 보여서 못 버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 주목을 받았다.

대우자동차의 성장사도 세계경영의 사례로 꼽힌다. 김 전 회장은 1980년대 대우자동차의 생산 능력을 연 200만대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해마다 자체 개발 모델을 내놓았다. 국내 자동차 생산량이 100만대에 불과한 때 대우는 1986년 르망을 시작으로 에스페로, 로얄 등 혁신 제품을 출시하며 성장가도를 달렸다. 김 전 회장은 당시 해외 체류 기간이 연간 280일을 넘길 정도로 해외 사업에 집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나친 확장, 결국 화근
영원할 것만 같던 그의 성공도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1999년 해체 직전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의 고용인력을 토대로 해외 21개 전략국가에서 현지화 기반을 닦고 있었다. 당시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1998년)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기업 규모는 2위에 달했다.

그러나 1998년 당시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린 데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겪으면서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당시 일본의 노무라증권은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통해 부정적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지만, 같은해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공중분해됐다.

김 전 회장에게도 악재가 이어졌다. 당시 공격적인 사업 확장으로 대우그룹의 재무 상황이 나빠지자, 분식회계와 대규모 차입으로 메우려고 한 게 부메랑이 됐다. 이후 그는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됐고, 1999년 10월 중국으로 도피했다. 2005년 입국했지만, 이듬해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8년6개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김 전 회장은 이후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김 전 회장이 마지막으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해 3월 열린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행사였다.
그러다 지난해 8월말 베트남 하노이에서 글로벌 청년 인재 양성 교육 현장을 방문하고 귀국한 이후 건강이 안 좋아졌다. 지난해 말부터는 병세가 크게 악화돼 아주대병원에서 장기 입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명 치료를 거부한 김 전 회장은 임종 전 "청년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GY교육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달라"는 유지를 마지막으로 영원히 잠들었다.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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