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노인情] 80세에 시작한 한글 공부 "잃어버린 내 인생 찾아"

윤홍집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2.07 10:00

수정 2019.12.07 10:00

한글 배우지 못한 고령층, 태어나서 처음 해본 공부에 '웃음꽃'
"11남매 맏딸로 태어나 글 못 배워… 이름도 못 썼던 80년 서러웠다"
[편집자 주] '노인情'은 지금을 살아가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서울 동대문고 A학원. 약 25명의 노인들이 모여 한글을 배우고 있다. [사진=윤홍집 기자]
서울 동대문고 A학원. 약 25명의 노인들이 모여 한글을 배우고 있다. [사진=윤홍집 기자]

은 말씀 들을 때는 무릎을 고~
두 귀가 어지게 들어야 한다 ♪

신발이 다 도록 학원 다니면~
어버린 내 인생을 다시 찾는다 ♬

서울 동대문구 한 학원에서 서른 명 남짓 노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언뜻 노래 교실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한글 교실이다.


노인들은 동요 '산바람 강바람'을 개사해 'ㅀ' 받침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1%도 채 되지 않는다.

이곳에는 그 1%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잃어버린 내 인생'을 찾고 있었다.

A학원 한 수강생이 받침에 밑줄을 그으며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사진=윤홍집 기자]
A학원 한 수강생이 받침에 밑줄을 그으며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사진=윤홍집 기자]

■ 배우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에 학원 등록도 못 하고 '전전긍긍'


지난 2일 방문한 A학원 한글반은 여느 중·고등학교보다 활기를 띠고 있었다.

강사가 '화분을 거실로 들여놓았다'라는 예문을 읽자, 머리가 희끗한 노인들은 큰 소리로 따라 하며 한 글자씩 받아 적었다.

강사의 말에 "예" "네" "아니요" 빠짐없이 대답하는 모습은 해맑은 유치원생을 떠올리게 했다. 약 30명의 노인 중 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글반의 주 연령대는 65~80세다. 적지 않은 나이다 보니 찜질기를 허리에 두르거나 복대를 차고 있는 노인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수업 태도가 좋냐고 관계자에게 묻자, 처음부터 적극적이진 않았다는 게 답변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수강생의 대부분은 한글반 등록을 망설인다. 가장 큰 이유는 배우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두세 번씩 학원 앞까지 왔다가 용기를 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인이 많다. 못 이긴 척 가족의 손에 이끌려 오거나, '영어반도 있냐'고 운을 떼다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털어놓는 경우도 있다.

강사가 학원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노인을 보고 직접 설득해 한글을 배우게 된 노인이 올해 2명이나 있었다는 후문.

학원 관계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학원에 오기 어려워한다"며 "하지만 학원에서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공부하는 재미를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이야 누구나 의무교육을 받지만 과거에는 그러지 못했다"며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즐겁다는 분들도 있다. 모두 배우지 못한 한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고 강조했다.


김관자(83세) 할머니는 A학원에서 9개월째 한글을 배우고 있다. 한글을 배우는 건 그의 가장 큰 낙이라고. [사진=윤홍집 기자]
김관자(83세) 할머니는 A학원에서 9개월째 한글을 배우고 있다. 한글을 배우는 건 그의 가장 큰 낙이라고. [사진=윤홍집 기자]

■ "이름 못 썼던 80년… 한글 배우고 자신감 생겨"


시골에 학교가 없어서.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서. 농사일을 해야 해서 등 저마다 배우지 못한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결국 이유는 그 당시의 가난으로 수렴한다.

다만 유독 눈에 띄는 건 한글반 수강생의 90%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이날 수업에 참여한 약 25명의 노인 중 단 2명만이 남성이었다.

학원 관계자는 여성 수강생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를 과거 남성중심적 사회와 연결 지어 설명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녀를 많이 낳다 보니 모두 교육시킬 수 없었고 남성이 주로 기회를 받았다는 것.

이러한 인습은 A학원을 9개월째 다니고 있는 김관자(83세) 할머니의 사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김 할머니는 11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글을 배울 새도 없이 집안일을 했고 10명의 동생을 돌봤다. 그가 18세가 되던 해 조부는 보리 두 가마를 받고 김 할머니를 시집보냈다.

결혼 후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다. 가정을 살피면서 76세까지 의류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자식들이 모두 장성하고 83세가 되어서야 겨우 글을 배울 수 있게 됐다.

김 할머니는 "어느 날 아들이 차를 태워주더니 학원에 데려가더라. 내가 글을 배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라며 "아들에게 정말 고마웠다"고 전했다.

이어 "평생 배워 본 적이 없어서 글씨를 쓰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며 "아침에 눈을 뜨면 얼른 일어나서 세수하고 숙제부터 해놓는다. 학원 갈 시간이 기다려진다"고 덧붙였다.

김 할머니는 최근 학원에서 칭찬을 받았다며 쑥스럽다는 듯 숙제 노트를 펼쳤다. 노트에는 '흑임자죽'과 '맨처음인데요', '절임배추'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참 잘했어요'를 뜻하는 빨간색 하트는 노력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는 "이름도 쓸 줄 몰라서 병원이나 은행을 가면 직원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그간 답답하고 서러워서 참 많이 울었다"며 "지금은 내 이름이랑 간단한 단어를 쓸 수 있다.
정말 용기가 생긴다"고 말했다.

#노인 #한글
banaffle@fnnews.com 윤홍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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