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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아세안]②1967년 5개국 출발…그들은 왜 뭉쳤나

뉴스1

입력 2019.11.17 06:30

수정 2019.11.17 06:30

1967년 아세안 창설을 위한 방콕 서명식 모습(한-아세안센터 제공)
1967년 아세안 창설을 위한 방콕 서명식 모습(한-아세안센터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일 태국 방콕의 임팩트 포럼에서 열린 제22차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해 각국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리센룽 싱가포르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리커창 중국 총리,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 문 대통령,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일 태국 방콕의 임팩트 포럼에서 열린 제22차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해 각국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리센룽 싱가포르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리커창 중국 총리,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 문 대통령,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청와대 제공)


이은현 디자이너
이은현 디자이너

(서울=뉴스1) 김현철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 가운데 가장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세안. 문 대통령은 이번 달만 해도 태국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를 다녀왔으며, 오는 25일부터 부산에서 열리는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우리와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는 아세안은 왜 탄생했을까. 또 한국은 아세안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동안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아세안 전쟁 위협 극복 위해 탄생…10개국 체제 1984년 시작

아세안은 서로 협력하고 단결해 전쟁의 위협을 극복하고 지역 안정을 달성하기 위해 탄생했다.

1967년 8월 이른바 '방콕선언'을 통해 Δ인도네시아 Δ말레이시아 Δ필리핀 Δ싱가포르 Δ태국 등 동남아 5개국이 결성한 지역기구로 출발한 아세안은 태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식민지배를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독립한 신생 국가들이었다.

1984년 브루나이, 1990년대 Δ베트남 Δ라오스 Δ미얀마 Δ캄보디아가 가입해 현재의 10개 회원국 체제가 구축됐다.
이로 인해 인구와 영토가 급격히 증가해 아세안의 지정학적·경제적 중요성이 질적으로 변화됐다.

경제적으로 중국과 인도가 부상하고 있고, 미·중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지정학적 환경에서 아세안은 회원국 간 단합을 유지하면서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발전해왔다.

아세안과 한국이 함께 살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은 유럽에 비해 지정학적 환경 구조가 복잡하다. 단순하게 보면 안보는 미국과의 양자 동맹 중심이고, 경제는 지역 공급망 구축으로 상호 의존적이다. 또 역사와 영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지역협력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잠복해 있다. 이러한 복합적 환경으로 인해 동아시아 지역협력은 아세안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아세안은 1970년대 미국, 일본, 호주 등 6개국과 대화관계를 수립하고 자신들의 회의에 초청하기 시작했다. 1989년 한국을 추가하고 1990년대 중국, 러시아, 인도를 추가해 현재의 10개국 체제가 구축됐다. 아세안은 10개 대화상대국들과 각각 아세안+1 회의체를 갖고 있다. 이에 더해 아세안+3(한중일), 동아시아정상회의(EAS·East Asia Summit, 아세안+8), 그리고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아세안+17) 등 아세안 중심으로 동심원이 확산되는 모양새다. 이를 '아세안 중심성'이라고 부른다.

아세안 중심의 지역체제는 한국 외교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평가다. 한중일 3국 협력도 아세안과의 외교 과정에서 발전했고, 북한이 지역협력체 중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도 아세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세안에 끝없는 '구애'…대화 분위기 만들기 위해 '골프 회동'도

올해 한국에서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릴 정도로 우리와 아세안은 가까운 사이가 됐지만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아세안은 1970년대에 들어서 Δ호주 Δ뉴질랜드 Δ미국 Δ일본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대화상대국관계(Dialogue Partners)를 수립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 확대를 추진했다.

당시 한국도 아세안에 대화상대국관계 수립을 제의했으나 반응은 시큰둥 했다. 당시 한국의 국력에 비추어 실질적 협력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과 남북한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다는 고려가 작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에 198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세안 회원국 순방 이래 역대 외무 장관은 거의 모두 아세안 국가를 방문하면서 관계를 돈독히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1987~1988년 한국은 아세안이 대화관계 설정에 미온적임을 감안해 아세안 회원국 외무장관들에게 완전 대화상대국(Full Dialogue Partner)의 전 단계로서 부분 대화관계(Sectoral Dialogue Relation) 수립을 제시한 바 있다.

아세안의 태도가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우리의 '한강의 기적'과 '88서울올림픽 성공'을 목격한 이후부터다.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아세안 국가들 사이에서 경제협력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부상했다. 1987~1988년 한-아세안 회원국 간 교역 규모만 보더라도 우리의 대아세안 수출은 연평균 53%, 수입은 38%라는 증가율을 보였다.

1988년 10월 주태국 대사는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아세안 경제각료회의에서 정치를 제외한 타분야의 대화상대국으로서 한국을 선정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고 알려왔다. 10여년에 걸친 우리의 대(對)아세안 외교가 일정 부분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같은해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아세안 회원국 중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방문, 정상회담을 통해 한-아세안 간 공식 대화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로부터 다소 유보적인 반응이 나왔다. 당초 한국은 아세안과 통상·투자·관광 등 3개분야에 대해 협력할 예정이었으나 인도네시아는 회원국에 따라 희망 분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태국의 경우 한국과 부분 대화관계를 수립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고 알려왔다. 회원국 간 입장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이후 우리의 계속된 요청에 1989년 7월 브루나이에서 열린 제22차 아세안 외무장관회의에서는 한국과의 부분 대화관계 수립을 결의한다고 발표했다.

8월에는 서울에서 공동성명의 세부사안을 조절하기 위한 한-아세안 고위실무회의(SOM)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회의 전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아세안 대표들과 골프 회동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아세안은 한국이 동구 사회주의 국가와의 신규 협력으로 아세안과의 경제협력이 축소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내비치는 등 난항이 이어졌다.

실제로 우리의 희망과 달리 1990년 아세안 확대외무장관회의(PMC, Post Ministerial Meeting)에 한국의 참석은 성사되지 못했다. 아세안이 갖고 있는 우리의 협력의지에 대한 우려를 확실히 불식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마침 1990년 9월 당시 아세안 상임위 의장국인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맛 수상이 방한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우리의 북방정책과 APEC 활성화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고, 한-아세안 협의체제의 발전을 위해 의장국인 말레이시아의 협조를 당부했다. 마하티르 수상이 아세안 전체를 대상으로 한 한국어 연수센터 설치를 요청한 데 대해 선뜩 100만달러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다음해 1월 쿠알라품푸르에서 열린 아세안 상임위에서는 한국을 완전 대화상대국으로 격상시키고 PMC에도 초청하기로 합의했다.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1991년 7월 아세안 외무장관회의는 한국의 완전 대화상대국 격상을 결정했다.
이로써 우리는 아세안과 1989년 11월 부분 대화관계를 수립한 데 이어 2년 만에 완전 대화상대국 지위를 갖게 됐다. 이는 한국의 대아세안 외교가 선진국 대화상대국 수준으로 격상되면서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입지가 강화됨을 의미했다.
아세안+3 정상회의와 EAS를 비롯해 다양한 수준과 분야의 협력체에 한국이 창립멤버로 참여해올 수 있었던 것도 1989년 대화관계 수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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