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대기업

日수출규제 100일, 잠자던 한국 산업계 역동성 깨웠다

뉴스1

입력 2019.10.12 07:01

수정 2019.10.12 07:01

삼성전자 연구원이 마이크로LED 개발라인에서 유리 배선검사기에 기판을 올려 검사하고 있다.(삼성전자 제공) © News1 장은지 기자
삼성전자 연구원이 마이크로LED 개발라인에서 유리 배선검사기에 기판을 올려 검사하고 있다.(삼성전자 제공) © News1 장은지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7월12일 일본 출장을 마치고 서울 강서구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2019.7.12/뉴스1 © News1 허경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7월12일 일본 출장을 마치고 서울 강서구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2019.7.12/뉴스1 © News1 허경 기자


©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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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근 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장. 2019.8.22/뉴스1 © News1 허경 기자
박재근 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장. 2019.8.22/뉴스1 © News1 허경 기자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차 일본수출규제대책 민·관·정 협의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2019.7.31/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차 일본수출규제대책 민·관·정 협의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2019.7.31/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

(서울=뉴스1) 류정민 기자,권구용 기자 = 일본의 수출 규제로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한국의 핵심 산업이 무너질까, 아니면 오히려 한국 산업계가 잃었던 역동성을 되찾게 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까.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 공정에 필요한 3개 핵심소재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에 나선 지 이달 11일로 100일이 지났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월4일부터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을 포괄허가 대상에서 개별허가로 전환한 데 이어, 8월28일부터는 한국을 수출 절차에서 우대해주는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도 배제했다.

특히 개별허가로 전환한 3개 품목은 일본 의존도가 높으면서도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공정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품목이어서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는 한국의 핵심산업을 무너뜨리겠다는 경제전쟁의 '선전포고'로 간주됐다.

한국의 첨단 산업에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커졌지만, 정부와 산업계는 이번 수출 규제를 일본에 의존해온 기술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보고 민관정 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총력 대응에 나서고 있다.

◇민관, 소재 수급선 다변화 총력…부품 산업 투자도 확대

수출규제와 관련한 보도가 처음 나왔던 지난 6월만 하더라도 한국 정부와 산업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100여 일이 지난 12일 현재는 해당 품목의 국산화와 대체 수입선 확보 등을 위한 산업계의 노력이 차츰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정부가 개별허가 품목으로 전환한 3개 품목은 한국의 핵심 산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정조준하고 있다.

포토레지스트는 빛을 인식하는 감광재로 반도체 회로나 화상 형성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소재다. 불화수소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웨이퍼에 회로를 식각할 때 사용되며,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열 안정성과 강도 등의 특성을 강화한 필름으로 플렉서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를 만들려면 반드시 필요하다.

이들 3개 소재 모두 일본이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의 일본산 의존도는 상당히 높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1~5월) 포토레지스트의 일본산 의존도는 91.9%, 불화수소는 43.9%,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93.9%에 달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품질 면에서 월등하다고 평가받는 일본 제품을 써왔다. 이전까지는 이들 반도체 기업들이 일반포괄허가에 따라 통상 1주일 이내에 한국으로의 수출 허가를 내줘 소재 수급에 문제가 없었지만, 통상 90일 걸리는 까다로운 심사를 매번 받아야 하는 개별허가로 전환하면서 소재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7월 엿새간 일본 출장길에 오른 것도 그만큼 해당 소재가 중요하기 때문으로 현지 정·재계 고위급 인사와 비공개 회동을 하며 다각도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일본의 개별허가 전환 이후 이들 3개 핵심 소재의 허가 건수는 현재까지 단 7건(기체 불화수소 3건, 포토레지스트 3건, 플루오린폴리이미드 1건)에 불과하다.

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기업들은 비상경영체제를 가동하고, 이들 핵심소재를 비롯해 일본 의존도가 높은 품목의 국산화 및 수입선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전날(11일) 개최한 '제1차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위원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업계는 3개 소재 품목에 대해 미국과 중국, 유럽산 등의 제품을 공정에 투입해 테스트 중이다. 특히 일본이 아직까지 수출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는 불산액(액상 불화수소)의 경우 중국과 대만에서 들여온 제품의 테스트를 완료하고 생산공정에 투입하고 있다.

또 국내 생산도 활발히 추진, H사(社)는 불산액 기존공장을 증설·가동 중이며 완공된 신규공장이 정상 가동되면 생산능력 2배 확대될 것으로 알려졌다. A사, C사는 H사는 현재 국산 불산액 테스트를 완료하고 일부 공정에 투입하고 있다.

I사의 경우 불화수소가스 신규 공장을 완공할 예정이며, J사는 불화 폴리이미드(PI) 신규 공장을 짓고 있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로 1100여개 전략물자에 대해서도 개별허가가 적용되면서 소재부품산업 투자도 확대되고 있다.

효성은 1조원을 투자해 내년부터 전주의 탄소섬유 공장을 증설하기로 했고, 현대모비스는 2021년 친환경 차 부품 양산을 목표로 3000억원 규모의 공장 투자를 결정했다.

또 SK실트론은 미국 듀폰 웨이퍼 사업부를 인수하기로 했고, 현대차는 미국 앱티브 테크놀로지스와 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하는 등 한해외기업 인수를 통한 핵심소재 및 기술력 확보도 확대되고 있다.

정부도 소재부품 안정성 강화를 위한 지원에 나서고 있다. 우선 포토레지스트 등 25개 품목은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650억원의 연구개발비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 또 소재 공급 기업이 개발한 품목을 수요기업이 생산라인에서 테스트하는 양산평가도 활발해, 반도체가 84건, 기계분야는 20건이 진행됐다. 국내 투자의향이 있는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해외기업에 대한 국내 투자도 적극 유도, 미국 장비회사인 다사의 한국내 연구개발센터 유치가 지난 9월 말 확정됐다. 미국 화학소재분야 라사는 한국 내 반도체 소재개발 및 생산시설 투자 프로젝트를 검토하고 있고, 독일 소재분야 마사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소재 생산시설 투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화학물질 취급 인허가기간을 기존 75일에서 30일로 단축하는 등의 화학물질관리법 고시개정, 특별연장근로 인가(12개 사업장, 815명) 등으로 기업의 생산과 연구활동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산업계, 팽팽한 긴장감… "장기 대책 통해 원천기술 확보해야"

현재까지는 한국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지만, 산업현장에서는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한 대형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거래선 다변화를 위해 지속해서 노력하고 있고 일부 공정에서는 대체 소재를 투입하고 있지만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외부에서 우려하는 만큼 생산 차질이 있지는 않지만, 불확실성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문제가 없다고 안심할 만한 수준으로 검증하기 위해서는 최소 6개월은 필요한데 이제 겨우 3개월이 지났을 뿐"이라고 말했다.

또 대형 반도체사 관계자는 "국산화를 포함한 소재 수급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고, 또 일본으로부터의 수입도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라 일본 상황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액상 불화수소는 일부 국산화했고, 기체 불화수소는 대체 수입선을 찾는 등 현재까지는 큰 문제 없이 일본 수출 규제 해답을 찾아가고는 있다"며 "다만 일본의 규제가 한국에 전화위복이 됐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본다"고 했다. 한 대기업 계열 디스플레이 업체 관계자는 "태스크포스를 운영하면서 문제가 될 품목을 파악하고 거래선 다변화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며 "지금까지는 피해 없이 잘 대처해왔다고 하더라도 소재공급 차질은 언제든 빚어질 수 있는 문제로 지속해서 대응책을 업그레이드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소재부품 산업의 경쟁력을 지속해서 키워나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여전히 액제 불화소수는 일본 정부의 수출 허가가 안 나고 있고, 화이트리스트에 배제되는 등 리스크는 여전하다"며 "장단기별 과제를 면밀하게 검토해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을 글로벌 톱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연구개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특히 반도체의 경우 소재와 부품 공급 업체들이 직접 테스트를 해보며 연구개발을 할 수 있는 한국형 테스트 베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긍원 고려대 디스플레이·반도체물리학과 교수는 "부품소재산업이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며 "중소기업이 소재나 부품을 개발하더라도 대기업으로부터 외면받는 경우가 많은데, 대기업의 선택을 용이하게 해줄 수 있는 테스트 베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소재부품 개발은 그 자체가 경쟁력인 동시에 원가를 낮추는 요인이 된다"며 "한 예로 실리콘 웨이퍼를 국산화에 성공했었는데, 그러자마자 실리콘 웨이퍼 가격이 절반이 됐다. 소재 개발이 가격 하락 압박 요인이 되고 이는 전반적으로 국가의 이익을 올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소재부품 개발은 중요하다"라고도 했다.


이 교수는 "이번 일본 수출 규제와 관련해 정부가 응급처방식으로 대책을 내놓았는데, 부품소재산업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부가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서 몇십 년, 몇백 년 갈 수 있는 기반시설을 만들어 원천기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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