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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아프리카돼지열병과 북한 멧돼지

김경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9.19 17:19

수정 2019.09.19 18:52

[여의도에서]아프리카돼지열병과 북한 멧돼지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우라늄 노심이 드러나는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당시 소련 정부는 단순한 화재라며 사건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사고 당일 시민들은 엄청난 방사능을 내뿜는 사고 현장이 아름답다며 철교 위에서 구경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미국이 위성사진을 확보하고, 수천㎞ 떨어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아이들의 외출을 자제시킨다는 소식이 들리자 소련 정부는 사고 발생 36시간 만에 한시적 대피령을 내린다. 정부는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거짓 메시지로 선동한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세계는 체르노빌을 '죽음의 땅'으로 기억하게 됐다.

체르노빌 사고는 정부의 대처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체르노빌도 결국은 정부의 거짓이 키운 인재(人災)였다.

지금 한국은 아프리카돼지열병(ASF)으로 국가적 난리를 치르고 있다. 특히 ASF 발생경로를 놓고 각종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부는 파악하지 못했다.

정부의 초동대처는 그 나름대로 기민했다고 본다. 발빠른 조치로 차단방역에 총력전을 펼쳤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초기 확산을 차단한 것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다음 단계인 유입경로 파악과 관련해선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다. 정부가 역학조사 중이지만 감염경로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ASF 발생경로는 △바이러스가 있는 남은 음식물을 먹였거나 △농장 관계자가 외국에서 바이러스를 묻혀 입국했거나 △보균 중인 야생 멧돼지에 의한 감염 등이 지목되고 있다.

역학조사를 통해 앞의 2가지 추정은 이미 제거된 상황이다. 남은 가능성은 발병국인 북한 야생 멧돼지에 의한 감염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정부는 이 가능성을 웬만하면(?) 믿고 싶지 않은 눈치다.

전날 환경부는 점검 결과 파주 지역의 야생 멧돼지 전염에 의한 발병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발표했다. 근거는 주변 지역과 단절된 곳으로 멧돼지 서식 가능성이 낮다는 점, 마을 이장도 해당 지역에 멧돼지 활동이 없었다고 전한 점 등을 들었다.

야생 멧돼지에 의한 ASF 감염은 러시아 방목농가에서 2건밖에 보고되지 않았고, 유럽과 아시아에서 보고된 적이 없다면서 그 가능성을 외면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또 말이 바뀌었다. 경기 연천 양돈농가 주변은 멧돼지가 많은 환경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북한에서 내려온 야생 멧돼지 외엔 다른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것일까.

북한은 문재인정부의 무기이자 약점이다. 최근 또다시 북한과 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ASF 유입경로로 북을 지목하는 것이 정부로서는 부담이 될 것이다.

당국이 진행 중인 역학조사는 최대 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시기가 내년 총선과 겹친다. 정부는 내년 총선 이전에 ASF 유입경로 조사 결과를 발표할 수 있을까.

'국민안전'은 이 정부의 최고 기치이지 않나. '북한과의 관계' '국민안전'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일 테다. 안전이 정치와 붙었을 때 우리는 최악의 참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목격했다.

역사적으로도 큰 사고는 인재를 동반했다. 감추려고 할수록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를 그린 드라마 '체르노빌'에선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든 거짓은 진실에게 빚을 진다.
언젠가 그 빚은 갚게 된다."

km@fnnews.com 김경민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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