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구본영 칼럼]해리스 대사가 몰디브로 간 까닭은

구본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9.11 15:46

수정 2019.09.11 15:46

한·미동맹 이상기류 드러나
미군 철수 후 필리핀을 보라
내실 없는 자주 안보는 공허
[구본영 칼럼]해리스 대사가 몰디브로 간 까닭은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주 5~6일 서울안보대화(SDI)에 불참했다. 3~4일 몰디브에서 열린 인도양 콘퍼런스(IOC)에 참석하면서다. 애초 우리 국방부가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출신인 그의 SDI 참석을 바랐지만, 이를 뿌리치면서 뒷말이 무성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불만 표시라는 해석이 그 하나다. 외교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선언 이후 지난달 28일 그를 사실상 초치했다. 미국 국무부, 국방부에서 '우려'와 '실망' 등 반응이 이어지자 그를 통해 "불만 표명을 자제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지소미아 파기에 대한 미국 측의 부정적 시각은 변함없었다. 해리스의 SDI 외면도 그 연장선상의 시그널이란 뜻이다.

해리스 대사의 IOC행에서 그 이상의 함의도 읽힌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참여하라는 메시지란 얘기다. 바꿔 말해 문재인정부에 중화 패권을 견제하려는 대오에서 이탈하지 말란 주문이다. 실제로 그는 IOC 연설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지역의 정신'을 거론하며 "이는 문 대통령의 '신남방정책'에도 반영돼 있으며, 미국의 비전과 조화를 이룬다"고 강조했다.

마침내 '진실의 순간'을 맞은 느낌이다. 그간 남북 및 미·북 정상회담 등 화려한 평화 이벤트 속에 가려져 있던 안보 현실이 드러나면서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가 5일 공개한 보고서를 보라. 북한은 대화 국면에서도 한·미의 탄도미사일방어(MD) 체계를 뚫을 수 있을 정도로 핵·미사일 능력을 키워왔다고 평가했다. 순항한다고 했던 한·미 전시작전권 전환도 난기류에 휩싸였다. 미국이 해외주둔 미군이 외국군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는 '퍼싱 원칙'을 고수할 것이란 보도까지 나왔다.

주한미군기지 조기반환 요구도 잠복했던 동맹 균열의 속살을 드러냈다. 심지어 안보전문가 일각에선 문재인정부가 민족해방론의 관점에서 한·미 동맹 해체를 추구할 것이라는 의구심까지 제기한다. 대놓고 "남북관계에 가장 큰 장애물은 유엔군사령부"(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라고 하는 판이니…. 북·중이 '풍우동주'(비바람 속에서 한 배를 탄다)를 다짐하고 있는 터라 지소미아 파기는 더 불길해 보인다. 한·미·일 공조 대신 북·중·러 연대로 접근하는 신호로 비쳐서다.

현 정부의 전신인 참여정부의 행로를 되짚어 봤을 때 이런 걱정이 기우라면 다행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따금 반미적 수사를 표출했지만, 임기 후반엔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이 그 증좌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막으려는 전략적 목표 때문에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할 근거도 없다. 즉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말도 못 된다"(김희상 전 노무현정부 국방보좌관)는 지적이다. 미군이 100년간 인연을 맺었던 필리핀에서도 1992년 하루아침에 발을 뺐기 때문이다.

미군이 떠난 뒤 만성적 정정불안에다 황폐해진 경제라는 이중고에 처한 필리핀은 좋은 반면교사다. 우리가 필리핀의 길을 답습할 이유는 없다.
한반도에서 미군이 떠나면 핵을 가진 북한과 그 뒤 중국의 몽니와 간섭이 일상화할 게 불을 보듯 뻔해서다. "동맹보다 국익이 더 중요하다"(청와대 관계자)는 말은 원론적으론 맞다.
하지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주 안보론'은 결국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 또한 세계사의 엄연한 교훈이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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