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대기업

‘묵시적 청탁’ 공포에 재계 혼돈… 사회적 공헌활동 위축되나

최갑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9.08 17:58

수정 2019.09.08 19:06

대법원, 이재용 후원 ‘부정’ 인정
'이현령 비현령'으로 기업 옥죄기
"정권 교체시 희생양 될수도" 우려
재계 "정부서 中企지원 요구 고민"
대법원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상고심에서 '묵시적 청탁'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한 이후 재계가 큰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구체적 청탁이 없더라도 기업의 사회공헌이나 정책 동참 등이 미래의 불이익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이 크게 위축될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8일 재계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대법원이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상고심에서 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을 원심과 달리 '부정한 청탁'으로 인정하면서 기업들은 혼돈을 겪고 있다.

당초 항소심은 삼성의 영재센터 후원금 16억원을 '경영승계'라는 현안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뇌물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삼성의 현안으로 이 부회장의 경영승계작업이 존재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 일환에서 영재센터 후원에 나섰다는 취지로 항소심 판단을 파기했다.

그러나 이같은 대법원 판결은 대법관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면서 혼란을 부추겼다.
조희대·안철상·이동원 대법관은 소수의견을 통해 "부정한 청탁의 대상이 되는 승계작업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영재센터 지원금이 박 전 대통령의 직무집행의 대가라는 점에 대한 공통의 인식이나 양해가 있었다는 것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로 반박했다.

이번 판결 이후 대기업들 사이에선 '묵시적 청탁'을 둘러싼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고용노동부를 담당하는 4대 그룹 대관 담당직원은 "이번 판결은 어떤 현안이 있는 기업이 공무원에게 구체적 청탁이 없더라도 향후 혜택을 바라거나 불이익을 우려해 정부 정책에 협조할 경우 유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이건 배임보다 더 강력한 '이현령 비현령(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으로 기업들을 옥죌 수 있다"고 걱정했다.

또 다른 4대 그룹 임원은 "경영승계 현안을 인정할 경우 문재인정부의 일자리 창출 정책에 재계가 동참하는 것도 묵시적 청탁으로 볼 수 있는 거 아니냐"며 "이런 논리라면 향후 정권이 교체되면 현 정부 정책에 협력한 기업들이 또 다른 정경유착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기업들은 정상적인 사회공헌사업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려는 조짐들도 나타나고 있다.

10대 그룹의 한 대관담당임원은 "충북지역 한 도시 축제를 10년 넘게 후원 중인데 이를 중단해야 할지 내부 검토 중"이라며 "해당 지역은 계열사 사업장이 위치한 곳이라 나중에 사업확장이나 인허가 이슈가 많은데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털어놨다.


삼성 계열사 임원은 "김영란법(청탁금지법)에 이어 대법원의 묵시적 청탁까지 인정돼 올 하반기 사회공헌사업에 문제는 없는지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다"며 "정부에서 중소기업의 생산성 개선에 인력과 자금 지원을 요구하는데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최양오 한국외대 경제학과 교수는 "평창동계올림픽 때 한전이 800억원을 후원했는데 이건 뇌물인가, 묵시적 청탁인가"라며 "정경유착과 정부정책 동참을 결정하는 기준은 뭔지 굉장히 모호한 상태에서 이번 판결이 나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묵시적 청탁의 기준을 명확히 하는 법제화가 우선"이라고 덧붙였다.

cgapc@fnnews.com 최갑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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