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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왜 우리는 아픈 역사를 반복하나

최갑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8.22 17:27

수정 2019.08.22 17:27

[여의도에서] 왜 우리는 아픈 역사를 반복하나
"반도체 등 핵심산업은 양국 간 교역규모가 워낙 크고 복잡해 경제보복 조치로 이어진 적은 없지만 진짜 문제는 '보이지 않는' 보복이다. 예컨대 일본 업체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핵심부품 공급을 의도적으로 늦추거나 다른 고객사 물량을 확대한다면 이의 제기도 어렵다."

"강제징용 판결로 자민당 등 일본 내 우익 진영이 반도체 제조 핵심소재인 불화수소(에칭가스)의 한국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생산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위안부 합의 파기와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한·일 관계의 파열음이 정점으로 치닫던 지난 2월 파이낸셜뉴스 보도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이 보도는 4개월여 뒤 현실이 됐다.
일본이 지난달 4일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들인 에칭가스, 포토레지스트(감광액), 플루오린 폴리이미드(PI)의 한국수출 절차를 개별허가로 강화한 것이다.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가)에서도 한국이 하루아침에 배제됐다. 일본의 조치에 국내 정치권과 정부는 아수라장이 됐다. '뒤통수를 맞았다' '일본이 자유무역 질서를 훼손했다' 등 일본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비등했다. 항일, 극일 같은 일제강점기의 용어들이 한반도를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과열 양상 속에 자성은 매국으로 치부됐다. 물론 일본의 경제보복은 치졸하다. 수출 강화조치 근거도 그때그때 바뀌었다. 안보 논리를 펼치면서 강제징용 판결의 대항조치를 은연중에 내비쳤다. 한국 측의 수차례 대화 제의에도 눈 한번 깜짝 안했다. 심지어 일본 고위 외교 당국자의 입에서 강제징용 판결의 해법을 갖고 오더라도 대화의 여지가 없다는 상식 밖의 이야기도 들렸다. 외교 결례를 서슴지 않는 국가가 이웃 나라라는 건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일본이 114년 전 을사늑약 때나 지금이나 한국의 국격을 폄훼하는 건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일본에 당하는가. 어쩌면 일본을 욕하면서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닐까. 이번 조치만 해도 그렇다. 지난해 10월 말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자 배상판결 직후부터 일본의 몽니는 예상됐다. 경제계에서는 절대 일본이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미 경제보복 조치 8개월 전부터 끊임없이 나왔던 우려들이다. 그런데도 "아무리 일본이라도 정치·외교 문제를 경제보복화할 리 없다"는 막연한 낙관론이 퍼졌다. 그 '설마'가 또다시 한국 경제를 덮쳤다. 임진왜란이나 구한말에도 일본의 침탈 가능성을 배격했던 아픈 역사가 반복된 셈이다.

만약에 올 초라도 정부와 정치권이 경제계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었다면 어땠을까. 일본의 수출제재 조치 이후 소재·부품 국산화가 한국 경제의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딱 6개월 전에 이런 움직임에 나섰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반도체 기업인들의 일본 출장 러시나 소재 확보 비상은 없었을 것이다. 국내 소재기업 육성도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반도체 기업들은 치인 신세다. 국산화나 수입처 다변화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30년 넘게 축적한 일본 거래처나 공정 안정화를 하루아침에 버릴 순 없는 노릇이다.
설사 국산화 테스트에 성공하더라도 양산화는 다른 이야기다. 자칫 급하게 바꾼 소재를 양산에 적용했다가 불량이 터지거나 공정에 이상이 생기면 수조원의 손실을 감당해야 한다.
매일 수율과 전쟁을 치르는 반도체 기업들에 소재 국산화의 시간은 짧기만 하다.

cgapc@fnnews.com 최갑천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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