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구본영 칼럼]'당나라 군대'로는 평화 못 지킨다

구본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7.17 17:46

수정 2019.07.17 17:46

평화의 길이 안전하려면 "부드러운 대화 필요하나..큰 몽둥이도 들고 있어야"
[구본영 칼럼]'당나라 군대'로는 평화 못 지킨다
한반도가 열강의 각축장임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위기가 쓰나미처럼 사방에서 몰려오면서다. 얼마 전 미국이 중국 5G 통신기업 화웨이 제재에 동참하라고 '사드 악몽'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문재인정부의 팔을 끌어당겼다. 한·일 관계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금 판결이 방아쇠를 당긴,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졸혼' 직전이다.

북핵 해법이 기대치만 부풀린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지금 무엇보다 심각한 건 소위 '해상 노크 귀순' 사태다. 10m 길이 북한 목선이 6월 12일 밤부터 57시간 동안 동해 북방한계선(NLL) 남쪽을 휘젓고 다녔는데도 까맣게 몰랐다니 말이다.
그것도 북한인 4명이 삼척항 부두에 올라 시민에게 휴대폰을 빌려 통화할 때까지.

그런데도 국방부는 목선 발견장소를 '삼척항 인근'으로 발표했다. 군의 작전 보고서가 아니라 피서객이 연인에게 쓴 엽서에나 등장할 문구다. 경계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윗선'의 눈치를 보느라 진상을 눙치려 했다는 의혹까지 자초한 꼴이다. 이낙연 총리가 국회 본회의 답변에서 "국민 눈높이에서 못난 짓"이라고 평가한 그대로다.

필자가 군 복무할 때 한 지휘관은 "군기가 빠지면 '당나라 군대'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물론 중화 대제국을 건설했던 당(唐)도 말기엔 군대가 오합지졸이었다는 얘기는 역사적 고증이 안 된 속설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당나라 군대'가 된 게 누구 때문이냐"(무소속 이언주 의원)는 힐난을 듣는 상황을 엄중히 인식해야 한다.

문재인정부 들어 전방 철조망도 제거하고, 정찰비행도 없애는 등 평화 이벤트는 넘쳐났다. 지난해 9·19 남북군사합의 이후 올해 6·17일자 국방일보 헤드라인이 '남북 평화 지키는 것은 군사력 아닌 대화다'였다. 하지만 그 결과가 북한 목선사건이라면 황당한 일이다. 군대가 군대답기를 포기하는데 평화의 보루인들 온전하겠나.

최근 2년간 남북 간 세 번, 미·북 간 두 차례 정상회담이 열렸다. 특히 얼마 전 판문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곁에 두고 현란한 이벤트를 연출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폭탄과 미사일 하나도 줄지 않았다. 이는 북한은 여전히 핵·미사일이 있어야 세습체제 유지가 가능하다고 본다는 역설적 방증이다. 작금의 군의 경계실패와 기강해이가 마음에 걸리는 이유다.

혹여 우리가 경제적 반대급부만 제공하면 북한 김정은 정권이 순한 양으로 바뀌리라고 보는가? 그렇게 믿는다면 아주 순진하거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진보적 정치학계 원로인 최장집 교수도 북 비핵화 협상이 타결돼도 베트남 같은 개혁·개방 노선을 취할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력이 몇 수 아래라 걱정할 필요 없다는 인식 또한 착각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중 경제력과 문화수준 등 모든 면에서 앞섰던 아테네는 상무주의 독재국 스파르타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멀리 거슬러 갈 것도 없다.
중국 대륙에서 국공 내전 당시 병력 수도, 보급능력도 월등했던 국민당 정부는 낡은 소총이 전부인 헐벗은 마오쩌둥 공산군에 밀려 대만으로 쫓겨났다.

"먼 길을 가려면 부드러운 말(言)과 큰 몽둥이를 들어라." 러일전쟁 중재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애용했던 서아프리카 속담이다.
구한말처럼 한반도 해역으로 격랑은 밀려오는데 평화에 대한 착시현상에 빠진, 대책 없는 무장해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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