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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도 민족 위해 기도하겠다" 유지로 남긴 통일의 희망 [이희호 여사 별세]

심형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11 18:00

수정 2019.06.11 18:00

이희호 1922∼2019
김대중 전 대통령과 47년 동행..현대사의 영광과 고난 함께 해
"남편 사형선고때 가장 두려웠다"..수감중인 DJ에 매일 격려의 편지
세번 방북… 남북관계 돌파구 역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밤 9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 여사는 11일 발표된 유지를 통해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가 생전에 활짝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에 전시돼 있다. 뉴스1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밤 9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 여사는 11일 발표된 유지를 통해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가 생전에 활짝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에 전시돼 있다.
뉴스1

10일 노환으로 별세한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영부인 가운데 가장 큰 획을 그은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화운동을 통해 군부독재 종식, 야당으로 수평적 정권교체, 남북화해 시대의 물꼬를 튼 주인공이라면 이런 김 전 대통령을 만든 건 이 여사라는 평가가 함께하고 있어서다. 이 여사의 삶이 청와대 영부인으로 빛나고 성공한 인생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김 전 대통령과 함께한 47년 세월은 현대 정치사의 어둡고 굴곡진 긴 터널과도 같았다.

반복된 투옥·가택연금·사형선고·망명으로 이어진 야당 지도자 남편 김대중 곁에서 옥바라지·구명운동 그리고 가난과 온몸으로 맞서 싸우며 아이들을 키워낸 건 오로지 이 여사의 몫이었다.

이 여사는 정치지도자 아내로서뿐 아니라 한 시대의 여성운동가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6·25전쟁 이후 여성운동가 출신으로 김대중정부 시절 여성 문제를 다루는 독립부처 등장과 사실상 제대로 된 여성 관련 제도가 마련된 건 이 여사의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DJ 정치적 동지 47년의 동행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가 부부로 인연을 맺은 건 지난 1962년이다. 마흔의 나이에 두살 연하인 김 전 대통령을 만날 당시에는 사별한 전 부인 사이에서 이미 홍일·홍업 형제가 있었다. 이 여사는 결혼 다음해 3남인 홍걸씨를 낳았다. 이 여사는 결혼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뒤 여성운동에 투신한 '엘리트 여성운동가' '신여성'이었다. YWCA 총무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던 때였다.

반면 김 전 대통령은 장래가 보장되지 않은 야당 정치인으로, 결혼 얘기가 나오자 가족들을 포함한 주변의 만류도 많았다. 이 여사는 후일 회고담에서 "잘생겨서"라고 농담으로 밝혔지만 이후 인터뷰 등에서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결혼 이후 여성운동가에서 물심양면으로 내조를 하는 정치인 아내로 인생행로 전체가 뒤바뀌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 패배 이후 망명·납치·구금·연금 등 정치적 고초를 겪었다. 이 여사의 인생도 남편을 따라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이 여사는 당시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김 전 대통령에게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며 독려하기도 했고 늘 든든한 후원자로 김 전 대통령 곁을 지켰다.



■"남편 사형선고 들을 때 가장 두려웠다"

이 여사에게 가장 어려운 시절은 1972년 유신 독재가 시작되며 열렸다.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압 끝에 투옥돼 사형선고를 받던 때다. 이 여사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라디오를 통해 남편의 사형선고를 들었을 때"라고 회고했다.

또 이듬해인 1973년에는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시련을 겪었지만 이 여사는 묵묵히 남편을 지지했다. 그는 수감 중인 남편에게 차입하는 옷은 속옷까지도 다린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에게 매일 편지를 써 격려의 마음을 전했다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의 시련은 끊이지 않았지만 곁에는 늘 이 여사가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투옥, 19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1982년 정계 은퇴 뒤 미국 망명, 1985년 귀국해 가택연금도 겪어야 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부인으로뿐 아니라 여성운동가로도 손색이 없는 활동을 했다. 1997년 김 전 대통령 당선 뒤 영부인 신분이 된 이 여사는 "국가지도자의 부인도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김 전 대통령을 도와 여성인권 향상 등을 위해 노력했다.

또 여성부 창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사는 지난 2009년 김 전 대통령 서거 뒤에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아 남북관계와 평화 증진, 빈곤퇴치 등을 위해 힘썼다. 특히 2011년 말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시 조문단으로 방북,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상주인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2015년 93세 나이에 세 번째 방북길에 올랐다.
그래서 남북관계가 출구 없이 충돌이 이어질 때면 늘 정치권에서 이 여사의 역할론이 나오기도 했다. 이 여사는 사회운동가로 노년에 더 활발한 활동도 했다.
지난해 '미투운동'이 전국에서 거센 상황에선 피해자들에게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가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cerju@fnnews.com 심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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