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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영원한 민주화 동지..역사의 뒤안길로 지다

심형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11 16:37

수정 2019.06.11 16:46

 아내이자 뜻을 같이한 정치적 동지 47년의 동행
11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에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11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에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97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 여사는 11일 발표된 유지를 통해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에 전시된 이희호 여사의 생전 활동 모습.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97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 여사는 11일 발표된 유지를 통해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에 전시된 이희호 여사의 생전 활동 모습.
1992년 8월 13일,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서교동성당에서 납치 생환 19주년 기념미사를 보고 있다.
1992년 8월 13일,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서교동성당에서 납치 생환 19주년 기념미사를 보고 있다.

10일 노환으로 별세한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영부인 가운데 가장 큰 획을 그은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화운동을 통해 군부독재 종식·야당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남북화해의 시대의 물꼬를 튼 장본인이라면 이런 김 전 대통령을 만든 건 이 여사라는 평가가 함께하고 있어서다.

이 여사의 삶이 청와대 영부인으로 빛나고 성공한 인생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김 전 대통령과 함께한 47년의 세월은 현대 정치사의 어둡고 굴곡진 긴 터널과도 같았다.

반복된 투옥·가택연금·사형선고·망명으로 이어진 야당 지도자 남편 김대중 곁에서 옥바라지·구명운동, 그리고 가난과 온몸으로 맞서 싸우며 아이들을 키워낸 건 오로지 이 여사의 몫이었다.

이 여사는 정치 지도자 아내로뿐 아니라 한 시대의 여성운동가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6.25 전쟁 이후 여성 운동가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 여성 문제를 다루는 독립 부처 등장과 사실상 제대로 된 여성 관련 제도가 마련된 건 이 여사의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DJ 정치적 동지 47년의 동행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가 부부로 인연을 맺은 건 지난 1962년이다. 마흔의 나이에 2살 연하의 김 전 대통령을 만날 당시에는 사별한 전 부인 사이에서 이미 홍일·홍업 형제가 있었다. 이 여사는 결혼 다음해 3남인 홍걸씨를 낳았다.

이 여사는 결혼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뒤 여성 운동에 투신한 '엘리트 여성운동가', '신여성'이었다. YWCA 총무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던 때였다.

반면 김 전 대통령은 장래가 보장되지 않은 야당 정치인으로 결혼 얘기가 나오자 가족들을 포함한 주변의 만루도 많았다.

이 여사는 후일 회고담에서 "잘 생겨서"라고 농담으로 밝혔지만 이후 인터뷰 등에서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결혼 이후 여성운동가에서 물심양면으로 내조를 하는 정치인 아내로 인생행로 전체가 뒤바뀌었다.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 패배 이후 망명·납치·구금·연금 등 정치적 고초를 겪었다. 이 여사의 인생도 남편을 따라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이 여사는 당시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김 전 대통령에게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며 독려하기도 했고 늘 든든한 후원자로 김 전 대통령 곁을 지켰다.

이 여사는 훗날 자서전에서 당시를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며 "운명은 문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거세게 노크했다"고 회상했다.

■"남편 사형선고 들을 때 가장 두려웠다"
이 여사에게 가장 어려운 시절은 1972년 유신 독재가 시작되며 열렸다.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압끝에 투옥 뒤 사형선고를 받던 때였다.

이 여사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라디오를 통해 남편의 사형 선고를 들었을 때"라고 회고했다.

또 이듬해인 1973년에는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시련을 겪었지만 이 여사는 묵묵히 남편을 지지했다.

그는 수감 중인 남편에게 차입하는 옷은 속옷까지도 다린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에게 매일 편지를 써 격려의 마음을 전했다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의 시련은 끊이지 않았지만 곁에는 늘 이 여사가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투옥, 19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1982년 정계은퇴뒤 미국 망명, 1985년 귀국해 가택연금도 겪어야 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부인으로뿐 아니라 여성운동가로도 손색이 없는 활동을 했다.

1997년 김 전 대통령 당선 뒤 영부인 신분이 된 이 여사는 "국가 지도자의 부인도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김 전 대통령을 도와 여성 인권 향상 등을 위해 노력했다.

또 여성부 창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사는 지난 2009년 김 전 대통령 서거 뒤에는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으로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아 남북관계와 평화 증진, 빈곤 퇴치 등을 위해 힘썼다. 특히 2011년 말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시 조문단 자격으로방북,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상주인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2015년 93세 나이에 세 번째 방북길에 올랐다.
그래서 남북관계가 출구 없이 충돌이 이어질 때면 늘 정치권에서 이 여사의 역할론이 나오기도 했다. 이 여사는 마지막까지 사회 운동가로 노년에 더 활발한 활동도 했다.
지난해 '미투 운동'이 전국에서 거센 상황에선 피해자들에게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가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cerju@fnnews.com 심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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