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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급행료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06 17:02

수정 2019.06.06 17:02

고려시대의 문신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남자가 강을 건너는데 때마침 크기도 같고 사공의 수, 배에 탄 사람의 수도 같은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출발했다. 한데 한쪽 배는 빨리 가고 다른 배는 느렸다. 그래서 까닭을 물었더니 "저 배는 사공에게 술을 먹여서 빠른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공에게 먹인 술은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급행료'였던 셈이다.

오래전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캄보디아 공항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캄보디아에는 소위 '도착 비자'라는 것이 있다. 입국 절차를 밟기 위해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공항 경찰로 보이는 사람이 급행료를 내면 빨리 수속을 마칠 수 있다고 했다. 아직도 이런 후진적 관행이 있나 싶어 길게 줄을 서는 쪽을 선택했지만 이런 불쾌한 경험은 출국심사 때도 반복됐다. 급행료를 주지 않자 출국심사를 맡은 공무원은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했다.

몇 해 전엔 이런 웃지 못할 사연이 보도된 적도 있다.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에서 인허가 업무를 담당하는 한 직원 앞으로 '좋은생각'이라는 월간잡지가 배달됐다. 그런데 배달된 책 속엔 100만원짜리 자기앞수표 10장과 함께 이런 내용의 쪽지가 꽂혀 있었다. "옛날에는 급행료 개념도 있어 참 좋았는데, 요즘은 김영란법 때문에 뭐라 말씀도 못 드리고…저의 방식대로 시급성을 해결하면 안될는지요." 폐선부지 사용허가의 신속한 처리를 기대했던 청탁자는 결국 쇠고랑을 찼다.

없어진 줄 알았던 급행료가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최근 파업을 벌였던 민노총 소속 타워크레인 노조원들이 관행적으로 급행료를 받아온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업계에 따르면 크레인 기사들은 월급 외에 월례비(현장 하도급업체들이 주는 비공식적 수고비) 명목으로 뒷돈을 챙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시대 뱃사공이 그랬던 것처럼 급행료를 주면 노를 빨리 젓고, 그러지 않으면 태업을 불사했다.
지금이 과연 21세기 밀레니엄 시대 맞나 싶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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