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구본영 칼럼] 기로에 선 '당근 주도 평화론'

구본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4.10 17:31

수정 2019.04.10 17:31

'소주성'처럼 선후 바꿔서 당근만 쥐여주는 방식으론 북한 비핵화 실현에 한계
[구본영 칼럼] 기로에 선 '당근 주도 평화론'

정부의 경제·안보 정책이 동시에 중대 기로에 섰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등 소득주도성장론(소주성)은 역효과만 부르고 있다. 남북 간 대화와 협력을 통한 '한반도 평화론'도 북핵이란 걸림돌을 넘지 못하고 있다. 악재가 겹친 꼴이다.

하긴 '소주성'에 대해 다수 전문가들은 애초에 회의적이었다. '마차가 말을 끄는 격'이라면서다.
실제로 최저임금 인상 등을 시행해본 결과도 그랬다. 성장의 마중물이 되긴커녕 청년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비명만 커졌다. 아서 래퍼 교수 등 해외 석학들조차 "멍청한 이론"이라고 꼬집을 정도다.

문재인정부는 오로지 김정은 체제와의 협력, 즉 '당근'으로 한반도 평화를 일군다는 취지를 견지했다. 이를 '당근 주도 평화론'(당주평)이라 하자. 북한 비핵화를 위해 미국과 엇박자를 내면서 선(先)제재완화에 매달린 게 그런 기조였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처럼 수단과 목표가 뒤집한 '당주평'의 한계도 노정됐다.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이 영변을 제외한 핵시설은 꼬불쳐 둔 채 제재 전면해제를 요구하면서다.

'소주성'도, '당주평'도 당장 효과가 없긴 매한가지다. 다만 전자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선의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후자와 다르다. 지난주 청와대 경제원로 간담회에서 정운찬 전 총리가 "소주성이 저소득층을 위한 인권정책은 될 수 있어도 경제정책은 될 수 없다"고 한 말 그대로다.

후자는 북한 주민이 아니라 김정은 체제에 당근을 쥐여주겠다는 발상이라는 게 생래적 위험요인이다. 김정은 정권이 핵은 내려놓고 주민을 살릴 개혁·개방을 택한다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으면 문제다. 가뜩이나 반인권적 김정은 체제에 핵개발 보조금을 주는 우를 범하면 문명사적 관점에서 진보가 아닌 퇴보인 까닭이다.

'소주성'이든, '당주평'이든 바둑의 정석은 아니다. 물론 교착 국면을 타개하려면 묘수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덜컥 수'임을 알았다면 빨리 손을 터는 게 좋다. 요즘 정부 당국자들이 소주성 대신 혁신성장을 거론하고 있는 건 그래서 다행이다.

그러나 북핵 정책에 관한 한 정부는 여전히 '답정너'(답은 정해졌으니 따라만 해) 자세다. 얼마 전 김연철 통일부 장관 임명을 강행한 데서 읽히는 기류다. 조명균 전 장관은 지난해 방미 때 유엔 안보리 결의 등을 의식, "한국이 독자적으로 남북경협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한·미 공조에 힘을 실었었다. 반면 김 신임 장관은 개성공단 가동 재개 등 누차 '닥치고 대북지원' 입장을 밝혀왔다.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최근 문 대통령의 목표는 통일이 아닌 1국 2체제, 즉 '연방제'라고 주장했다. 이 추론이 다 들어맞을 걸로 예단할 순 없다. 하지만 현 정부의 '한반도 평화론'이 김정은 체제와 공존을 지향하는 건 맞다.

다만 북 세습정권과 평화공존이 바람직한 것인지 여부와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가능하려면 두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북핵의 폐기다. 다른 하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의 민주화와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스크럼에서 먼저 이탈하는 건 그래서 위험한 도박일 수 있다. 북한 정권이 체제동요 위험을 감수하면서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에 나설 유인만 약화시킬 수 있어서다.
그렇게 되면 자칫 '당주평'은 훗날 잘못된 '평화 설계도'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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