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밤을 잊다, 배움을 잇다, 희망이 있다

한영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3.28 17:21

수정 2019.03.29 14:42

야학에서 '배움의 나눔' 실천하는 사랑방 배움터
1999년 ‘파랑새 야학’ 출발, 금호동에 자리잡아
대학 새내기부터 사업가까지 순수 봉사로 수업
학생 대부분은 검정고시 준비하는 어르신들
교사도 학생도 보람과 행복… 정이 넘치는 교실
서울 금호동 열린금호교육문화관에서 야학단체 '사랑방 배움터'의 홍소영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범준 기자
서울 금호동 열린금호교육문화관에서 야학단체 '사랑방 배움터'의 홍소영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범준 기자

야학단체 '사랑방 배움터' 교사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야학단체 '사랑방 배움터' 교사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조금 늦은 졸업식이다. 또래 친구들은 40여년 전에 치른 졸업식. 야학에서 진행되는 조촐한 졸업식이지만, 감격은 늦춰진 세월만큼 커졌다. "먼저 떠난(사별한) 남편이 내가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남편이 너무 그립지만 정말 뿌듯하고 기쁘네요."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이순희씨(가명)는 자녀뻘의 교사들 앞에서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시절 형편이 되지 않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그는 환갑이 넘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지만 오히려 그 남편을 생각하며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다. 낮에는 생활전선에서 저녁에는 야학에서, 말 그대로 '주경야독'이었다. 결국 그는 당당하게 시험에 합격했고, 지금은 다음달 치러지는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다.

밤을 잊다, 배움을 잇다, 희망이 있다


다양한 이유로 배움의 기회가 끊긴 이들은 우리 주변에 많다. 4월과 8월, 해마다 두 번씩 치러지는 검정고시에는 매회 3만여명이 지원한다.

이들에게 '배움의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모인 봉사단체가 있다. '사랑방 배움터' 야학이다. 사랑방 배움터는 지난 1999년 서울 장한평에서 '파랑새 야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수년간 장소를 옮겨다니다가 지난 2014년 서울 금호동의 열린금호교육문화관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대안학교를 다니는 10대 청소년부터 80세가 된 어르신까지 다양한 학생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돕고 있다.

■대학생부터 사업가까지…'쌤'이 되다

사랑방 배움터에서 중졸·고졸반을 맡고 있는 자원봉사 선생님은 총 27명. 이들은 매주 한 번씩 수업을 진행하고, 역할을 나눠 인사·회계·총무 등 행정업무도 담당한다. 자원봉사자들만으로 운영되는 순수 봉사단체인 셈이다.

연령대와 직업도 다양하다. 대학생 새내기부터 40대 후반의 사업가까지, 사랑방 배움터에선 모두 '쌤(선생님)'이 되어 수업하고 회의한다.

이번 학기 사랑방 배움터의 대표를 맡은 김숭선 교사는 다섯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다. 김 대표는 "해외에서 학교를 나온 두 아들이 한국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 검정고시를 준비 중인데, 사랑방 배움터를 우연히 알게 돼 이곳에 가게 했다. 두 아들을 맡긴 게 감사하고 죄송해 봉사를 하게 됐지만, '선한 영향력'을 실천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그는 "특정 단체에 소속돼 있거나 지원금을 받기 위한 봉사단체가 많은데, 사랑방 배움터는 모든 걸 자원봉사 교사들이 진행하는 순수 봉사모임"이라고 강조했다.

이번에 처음 자원봉사 교사를 시작한 조은별 교사의 할머니도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중학생 때 할머니가 야학에서 공부했다. 60대가 되어 한글을 배우시고 수학과 역사도 배우셨다. 그때 할머니가 하루하루 정말 행복해하셨던 기억이 여전히 제 머릿속에 남아있다. 야학에서 한글을 배우신 이후론 저에게 편지도 써주시고 문자메시지도 남겨주신다. 그 이후로 배움에는 때가 없으며 언제나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모임인 만큼 교사들의 활동기간도 길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허진영 교사는 지난 2012~2013년 활동을 했던 '베테랑 선생님'이다.

허씨는 "처음 지원했을 땐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서였고 두 번째 지원했을 때는 보람 있게 가르쳤던 학생들이 생각나서, 세 번째는 '허진영 선생님이 너무 생각난다'며 보고 싶다는 학생의 연락에 지원했다. 다른 일정 때문에 쉰 적도 있지만 꾸준하게 2~3년을 해온 선생님들도 많다"고 전한다.

'사랑방 배움터'의 김숭선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범준 기자
'사랑방 배움터'의 김숭선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범준 기자


■"학생들에게 배움 주고 사랑받아"

자원봉사 교사들은 대부분 대학생, 그러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환갑을 넘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자녀뻘의 선생님들이 부모뻘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그러다 보니 힘든 부분도 있지만, 교사와 학생들이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넘어 사랑을 주고받는다.

부산이 고향인 신은주 교사는 "이번 설에 일이 있어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는데, 그 주 수업시간에 명절 음식을 싸오셔서 주시는 게 정말 기억에 남는다"며 "학생분들이 평소에도 집에서 직접 삶고 쪄온 계란과 옥수수, 음료 등을 챙겨주실 때면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약사 국가고시를 준비하면서도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묘송 교사는 "국어수업을 하던 중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나왔는데, 학생분이 그때 얘기를 해주셨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1960~70년대 작품을 설명할 때에도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셔서 오히려 저보다 더 깊게 작품을 이해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한다.

사랑방 배움터에서 공부를 시작해 중졸과 고졸 검정고시에 모두 합격한 오수남(가명) 학생은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면서도 항상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 혹시 하는 마음에 인터넷 검색으로 야학에 들어오게 됐는데 아들 같은 나이의 선생님분들의 열정에 뭉클할 때가 많다. 특히 상상도 못한 졸업식을 해주실 땐 더 감격스러웠다"고 전했다.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저녁엔 야학 학생들을 가르치는 홍소영 교사는 "야학 교실은 초등학교와 참 닮아있다. 뭐든 잘 해내는 모범생, 공부를 어려워하는 학생, 수업 시간에 조는 학생도 있다"며 "그러나 두 교실이 가장 닮은 점은 학생분들의 눈빛이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눈동자 만큼 빛나는 눈빛들로 나를 바라봐주신다"고 말했다김묘송 교사는 "쉬는 시간에 학생분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학생분이 '공부도 공짜로 가르쳐주고,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시 학교 다니는 기분이 들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정말 행복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사랑방 배움터가 앞으로도 배움의 장이 되어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행복하고 따뜻한 안식처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배움과 사랑의 장(場) 더 늘어났으면"

선한 일을 하는 만큼 선한 이들의 후원도 많다. 건일제약의 창립자인 고 김용옥 회장의 부인인 정영자 여사는 10여년 넘게 사랑방 배움터를 후원하고 있다.

정 여사는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정말 뜻깊은 일이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이 부족하다고 지원이 끊겨서 야학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후원을 결심했다. 사랑방 배움터에서 교사를 하던 학생이 얼마 전 결혼을 한다고 찾아왔는데, 내 자식처럼 기뻤다"고 말했다. 사랑방 배움터에서 교사를 하다가 취업을 하고 그만둔 이들도 소액 후원자가 되어 먼발치에서 야학을 응원한다.

사랑방 배움터의 교사들은 배움의 장(場)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금호동 말고도 다른 곳에도 사랑방 배움터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다른 곳과 연계해도 좋구요. 수업부터 시험까지 무료로 진행되는 곳이 적어서 일산같이 먼 곳에서 오시는 분도 많습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김숭선 대표는 "사랑방 배움터처럼, 배움의 기회가 필요한 학생들을 무료로 지원해주는 단체가 전국적으로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다양한 복지와 지원이 많지만, 여전히 교육 사각지대가 해결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요즘 찾아보기 힘들 게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쪼개 나눔을 실천하는 자원봉사자들에게도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갔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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