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구본영 칼럼]북핵 '진실의 순간'이 왔다

구본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3.13 17:30

수정 2019.03.13 17:30

투우사가 황소의 심장에 최후의 칼을 찌르는 순간..'염원적 사고' 벗어날 때
[구본영 칼럼]북핵 '진실의 순간'이 왔다


지난달 말 2차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되는 장면을 TV로 봤을 때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예언'이 들어맞는 걸 보고 소름이 돋았다. 회담 직전 미국을 방문한 우리 국회 대표단을 맞아 문희상 의장 등 여권 인사들의 희망적 관측에 찬물을 끼얹은 그였다. 즉 "김정은의 진정한 의도는 비핵화가 아니라 남한을 무장해제하는 것"이라면서.

하노이 회담 불발로 범여권의 허탈감도 클 법하다. 북한을 먹고살 만하게 해주면 핵을 포기할 것이란 믿음이 어그러지면서다. 유시민 작가는 '어용 지식인'을 자처했던 친여 인사다.
언젠가 그는 북핵 폐기 가능성을 낮게 보는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의 언행을 겨냥, "일개 공사의 말이라 얘기할 가치도 없다"고 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여권이 근거 없는 집단사고에 빠져든 징후로 비쳐진다.

탁현민 대통령 행사기획자문위원도 정상만찬 메뉴로 나온 북한의 배속김치에 주목했다. 그는 "음식만큼 좋은 결과가 있기를 고대한다"고 했지만 결과는 딴판이었다. 북측은 영변 핵시설 폐기의 대가로 제재 전면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이 영변 이외 핵시설의 비핵화 등을 '+α'한 빅딜 카드를 내밀자 회담은 '노딜'로 끝났다.

회담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북한이 놀랐던 것 같다"고 했다. 강선·분강 등 북의 비밀 핵시설에 대한 스모킹건을 제시했다는 뜻이다. 북측이 일부 핵능력을 꼬불쳐 둔 채 스몰딜을 하려다 꼬리를 밟힌 셈이다.

이로써 북핵 문제는 스페인이 본고장인 투우에서처럼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맞았다. 투우는 잔인한 경기지만 조연 투우사들이 소에게 붉은 천을 흔들며 실랑이를 벌일 때 오락성도 가미된다. 하지만 주연 투우사가 소의 심장에 최후의 칼을 찔러넣을 때는 다르다. 생사가 갈리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쇼가 통할 여지는 없다. 트럼프도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가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확인하면서 협상 테이블에서 일어섰을 것이다.

하노이 선언이 파투 난 뒤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협력에 기반한 신한반도체제 구축 의지를 천명했다. 삼일절 기념식에서 "금강산관광의 재개방안도 미국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언젠가 가야 할 방향이지만 현 시점에선 공허한 느낌이다. 한반도 평화로 가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북핵의 수렁에서 공회전 중이라서다. 12일 공개된 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 보고서를 보라. 미·북 대화 국면에서도 북은 우라늄 채광과 핵연료봉 인출을 계속하면서 핵 보유에 집착하지 않았나.

북핵의 '진실의 순간'에 다가선 지금 '당근'으로만 한계가 있다. 경제지원만 하면 북이 핵을 포기할 것이란 '염원적 사고'(wishful thinking)에서 벗어날 때다. 세습체제 유지가 김정은의 지상과제 아닌가. 그래서 핵 보유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남한 관광객들이 울타리 속에서 산만 보고 돌아오는 금강산관광보다 더 큰돈을 쓸 평양관광을 허용하지 않은 까닭도 마찬가지다. 체제가 흔들릴까봐서다.

이런 태도는 김정은 정권이 핵을 갖고 있다가는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때만 바뀔 것이다.
군사적 수단을 배제하면 현재로선 이를 견인할 옵션은 경제제재뿐이다. 북핵을 머리에 인 채 분단이 장기화하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된다.
문재인정부가 '당근'과 '채찍'을 배합하는 타이밍이 국제정치 역학을 좌우하는 냉엄한 기본원리임을 잊어선 안 될 시점이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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