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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칼럼]한반도, 지정학을 극복하라

강중모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3.10 16:21

수정 2019.03.10 16:26

[차관칼럼]한반도, 지정학을 극복하라

18세기 조선,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를 썼다. 당시 '택리지'의 인기는 상당했다. 어느 마을이 살기 좋은지를 알려주는 서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부동산의 가치는 종종 지리적 요건에 따라 결정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지정학적 조건은 그 나라의 생존방식과 발전전략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지리적 축복을 받은 나라'로 불린다.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천연장벽과 풍족한 천연자원을 갖췄을 뿐 아니라 주변에 미국을 능가할 만한 강대국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은 어렵게만 보인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지만 주변에 대양이 없다. 무엇보다 러시아·중국·일본이라는 군사·경제적 강대국 사이에 있다. 천연자원도 부족해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약 95%에 달한다. 여기에 남북분단까지 더해져 지정학적 환경은 더욱 악화됐다.

그러나 지정학적 조건이 국가의 번영을 결정하는 절대적 요소는 아니다. 미국 조지타운대 마이클 그린 교수는 저서 '신의 은총을 넘어서'에서 미국의 강력한 지위는 지리적 축복 때문이 아니었다고 분석한다. 오히려 치밀한 외교전략과 명료한 비전이 국력 증강에 더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진 조건하에서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전략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 역사에서 주어진 조건과 한계를 극복해 나간 선조들의 지혜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진취적 기상으로 강대국 사이에서 협력을 유도하면서 생존과 번영을 도모했던 사례들이다. 고려는 벽란도라는 무역항을 만들어서 서역~중국~일본~남양을 잇는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위상을 떨쳤다. '코리아'라는 영문 명칭이 고려에서 기인하게 된 이유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벽란도는 국제무역의 허브였고, 고려는 글로벌 통상국가였다. 한반도의 위치가 대륙에서 해양으로 나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올해는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다. 상하이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을 지낸 우사(尤史) 김규식 선생은 1948년 최초의 남북협상에 참여한 후 "남의 장단이 아닌 우리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제일"이라고 했다. 김규식 선생이 주문한 '우리의 장단'은 한반도의 평화를 견인하는 장단이어야 한다. 그리고 강대국도 함께 춤출 수 있는 흥겹고 보편적인 장단이어야 한다. 이런 장단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국력이 더 신장돼야 하고 이를 위해 정치적 자유, 경제적 효율성, 사회적 공정성이라는 세 가지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역량을 높은 수준으로 올려야만 낭비 없는 최적의 거버넌스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도 궁극적으로는 국력의 반영이며 내치의 연장이다. 자유롭고 효율적이며 공정한 거버넌스로 우리의 국력이 커질수록 주변 강대국들과의 외교를 감당해낼 저력이 생긴다.

아울러 실사구시 외교를 펼쳤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도 참고하면 좋겠다. 고려의 문신 서희는 송(宋)을 견제하려는 거란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 협상을 통해 소손녕의 대군을 물러가게 했다. 맹목적 사대주의 풍토 속에서도 급변하는 현실을 읽어내어 실사구시 정신을 주창한 조선의 실학파들도 있었다.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성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외교의 성공에는 지도자의 비전과 현실에 기반을 둔 외교정책, 이런 정책을 진심으로 수행하는 외교관들이 필요하다고 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냉엄한 현실에 맞서 훌륭한 지혜와 결의를 보여줬던 우리 선조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한반도에서 시작될 평화의 물결이 동북아를 뒤덮는 파도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조현 외교부 1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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