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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원의 News 속 인물] 현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알레산드로 멘디니

박종원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2.23 06:00

수정 2019.02.23 06:00

지난 2016년 10월에 방한해 서울대학교에서 강연하고 있는 알레산드로 멘디니.연합뉴스
지난 2016년 10월에 방한해 서울대학교에서 강연하고 있는 알레산드로 멘디니.연합뉴스


"비록 당신이 알레산드로 멘디니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당신은 그의 작품에 묶여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과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유명 디지인 비평가 앨리서 로쏜은 멘디니를 이렇게 평했다. 일평생 아날로그 감성을 추구하며 실용성보다 인간적인 감성을 추구했던 산업 디자이너 겸 건축가 멘디니는 이렇게 세상을 바꾸고는 지난 18일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31년 8월 16일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그는 1959년에 이탈리아 최대 기술대학인 폴리테크니코 디 밀라노를 졸업하고 건축학 학사 학위 받았다. 그는 졸업 후 '올리베티레터라32' 타자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겸 건축가 마르첼로 니촐리의 사무소에 들어가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1970년부터 6년간 건축잡지 까사벨라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는 건축과 산업디자인을 동시에 추구했으며 1973년에는 전통적인 디자인을 거부하고 급진적인 성향을 추구하는 공동 사업체 '글로벌 툴스'를 세워 2년간 운영했다.
멘디니는 1979년에 다른 디자이너들과 함께 급진 그룹 '알카미아'를 창설했고 동시에 세계적인 디자인 잡지 도무스의 편집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잡지를 내면서 1982년에 고향 밀라노에 포스트모더니즘 기조의 디자인 학교인 도무스 아카데미를 공동 창립했다. 멘디니는 작품 활동 중에도 모도(1977년)나 올로(1988년)같은 잡지사를 세우면서 출판 사업도 병행했다. 1989년에 58세가 된 멘디니는 밀라노에 동생 프란체스코 멘디니와 함께 '아틀리에 멘디니'라는 디자인 사무소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산업디자인에 집중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는 1979년과 1981년, 2014년 세 차례에 걸쳐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업디자인 부문의 상인 황금콤파스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는 유럽건축상을 받았다.

'현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렸던 멘디니는 전통적인 규범과 실용을 거부하고 철저히 인간과 가치에 집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주의자였다. 그는 우선 건축 부분에서 일본 히로시마의 파라다이스 타워, 네덜란드 그로닝거 미술관, 스위스의 아로사 카지노, 이탈리아의 베로나 비블로스 아트 호텔 및 나폴리 지하철 역사, 독일 하노버 버스정류장 등 세계 곳곳에 작품을 남겼다. 이들 건물들의 특징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들처럼 매우 비현실적이면서도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멘디니는 디자인에도 실용보다 감성을 추구했다. 그가 1994년에 이탈리아 디자인 소품 브랜드 알레시와 협업해 내놓은 와인따개 '안나 G'는 사용하기 어려운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1000만개 이상 팔렸다. 멘디니는 그 외에도 해와 달의 형상을 본뜬 스탠드 '아물레또', 가로와 세로가 4.5m에 달하는 초대형 의자인 '프루스트 의자' 등을 남겼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그로닝거 미술관과 프로스트 의자, 안나G를 꼽았다.

아울러 멘디니는 약 14년간 한국 기업들과 협업하며 한국에도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LG전자의 식기세척기와 냉장고 및 김치냉장고, 롯데카드의 카드, 한국도자기의 다기 디자인 등에 참여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도 멘디니가 도무스 편집장 시절에 발굴한 건축가다.

그는 2년 전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나는 휴대전화도 e메일도 사용하지 않는다.
종이와 연필, 손가락 세 개로 세상과 소통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공룡이다.
그러나 공룡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건 아직 사람들이 시적 감성과 여유, 돈이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거다"고 말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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