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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사다리 걷어차기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2.09 17:39

수정 2018.12.09 17:39

성(城)을 칠 때 가장 고전적인 수법은 사다리 오르기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위에서 사다리를 슬쩍 밀면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일쑤다. 19세기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선진국들이 사다리를 걷어차는 수법으로 후진국들을 견제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상에 오른 사람이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은 다른 이들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수단을 빼앗는 교활한 수법"이라고 말했다.

장하준 교수(영국 케임브리지대·경제학)는 지난 2002년에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란 제목으로 책을 썼다.
장 교수는 "과거 다른 나라의 특허권과 상표권을 밥먹듯이 침해한 선진국들이 이젠 후진국들에게 지식재산권을 선진국 수준으로 보호하라고 압력을 넣는다"고 말한다. 특히 미국은 전후 세계 최강국으로 떠오르기 전까지 '근대 보호주의의 아버지'이자 철옹성이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보면 사다리 걷어차기를 실감한다.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미·중 통상전쟁을 보라. 지난 봄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 통신업체인 ZTE가 대북·대이란 제재를 어겼다며 7년간 미국 기업과의 거래를 금지했다. ZTE는 핵심 기술·부품을 미국에 의존한다. 거래금지를 푸는 조건으로 ZTE는 경영진을 싹 바꾸고 벌금 10억달러를 내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에 꼼짝없이 무릎을 꿇은 셈이다. 지난 9월엔 푸쯔잉 중국 상무부 국제무역협상대표가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고, 부유한 사람은 계속 부유하란 말이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미국은 끄덕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이 자랑하는 통신장비업체 화웨이를 상대로 사다리를 더 세게 걷어찼다. 이달초 캐나다 정부는 미국의 요청으로 화웨이 창립자의 딸이자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멍완저우를 전격 체포했다. 미국은 동맹국한테도 화웨이 장비를 쓰지 말라고 대놓고 재촉한다.

한국은 힘껏 사다리를 기어올라 선진국 문턱에 이르렀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거침없는 걷어차기가 우리한테 꼭 나쁠 것 같진 않다.
중국의 제조업 2025 프로젝트에도 브레이크가 걸린 느낌이다. 하지만 속은 영 개운찮다.
트럼프식 걷어차기는 선진국, 후진국을 가리지 않으니 말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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