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나루]

사법부가 무너뜨린 삼권분립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2.06 17:04 수정 : 2018.12.06 17:04


1793년 미국 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고뇌이기도 했다. 유럽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중 어느 쪽에 설지를 결정해야 했다. 프랑스 혁명 여파로 유럽은 전화에 휩싸였고, 프랑스는 영국과 전쟁을 선포한 마당이었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프랑스의 협조는 절대적이었다. 프랑스가 없었다면 미국이 영국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이 프랑스와 동맹조약을 맺은 것은 당연했다.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는 전쟁 시 미국에 대해 협력을 요구할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외교를 중시하는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 등은 프랑스 편이었다.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등은 영국으로 기울었다. 종주국이자 가장 중요한 교역상대국이 영국이었다. 미국이 내심 원하던 중립선언은 사실상 영국을 편드는 것이었다. 프랑스와의 조약을 지키려면 유럽전쟁에 휘말릴 게 분명했다. 반대의 경우 국제적 신의 추락은 물론 국내의 반발 가능성도 있었다. 신생국 미국의 첫 외교적 위기였다.

대통령과 각료들이 치열한 토론을 벌여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대신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다. 연방대법원의 의견을 얻자는 것이었다. 조약 해석 등에 있어 대법원의 결론을 따르면 모두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었다. 존 제이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모두 워싱턴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웬만하면 대법원의 공식 견해를 밝혀 대통령의 곤경을 덜어줄 수 있었다. 워싱턴 대통령이 원한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정부 이름으로 질문을 대법원에 보냈지만 대통령의 뜻임을 분명히 하였다. 대법원의 답은 의외였다. 정부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헌법의 3권 분립 정신에 따라 법원이 분쟁 해결이 아닌 '권고적 의견(advisory opinion)'은 낼 수 없다는 논거였다. (대)법원은 '권고적 의견'을 표명할 수 없다는 확고한 전통의 시작이었다. 초대 대법원장 존 제이가 미국 사법제도에 가장 크게 공헌한 일이 바로 권고적 의견 거부라는 평가는 그 때문이다.

역사 얘기가 길었지만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독자들이 짐작할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임 시절 일본 기업을 대리한 김앤장 소속 변호사를 만나 사건 처리를 논의했다고 한다. 법원행정처 차장은 관련 서류를 직접 첨삭해 주었다던가. 수사와 재판결과를 보아야 하니 속단은 어렵다. 하지만 강제징용 판결 등에 있어 상식을 벗어나는 재판지연의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법관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금기를 범한 것이다. 사법부 수장으로서는 더구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외교관계를 걱정하는 등 나름 애국심의 발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법관은 그것마저도 판결에 녹일 수 있어야 한다.

대법원의 도움을 받지 못한 워싱턴 대통령이 더 큰 곤경에 빠졌는가? 아니다. 미국 행정부는 결국 1793년 4월 중립선언을 통해 양국에 대해 우호적이고 공평한 행동을 할 것을 선언했다. 전쟁에 휩쓸리지 않고 나라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다음해 미국 의회는 중립법을 제정했고 더욱 발전된 형태의 미국중립법(Neutrality Acts of the USA)은 이후 중립에 관한 국제법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분립된 3권이 각각 제 역할을 다할 때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정반대의 결과를 목격하고 있다. 최고 법관들이 금지선을 서슴없이 넘은 결과 전직 대법관은 물론 대법원장까지 사법처리를 앞두고 있다. 우리 사법부 최악의 흑역사로 기록될 일이다. 어떠한 방법을 쓰든 앞으로 사법 불신을 치유할 수가 있을지 걱정이다. "법관들이 법복을 입었다고 더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닐 고서치 연방대법관의 말이 떠오른다.

노동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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