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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줌인] 신화로 기억될 위대한 승리 '안시성'...5가지 결정적 장면들

최경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1.03 14:06

수정 2021.04.17 09:52

[역사줌인] 신화로 기억될 위대한 승리 '안시성'...5가지 결정적 장면들
[파이낸셜뉴스 최경식 기자]
#. "당 태종 이세민은 매우 총명하여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임금이었다. 난을 평정함은 탕왕과 무왕에 비할 수 있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성왕과 강왕에 가까웠다. 때에 이르러서는 기묘한 계책을 내는 것이 무궁하여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런데 동쪽 정벌에 있어서는 유일하게 '안시'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양만춘)는 가히 호걸이며 비상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역사)에는 그의 이름을 전하지 않고 있다. 이는 양자가 이른바 제와 노의 대신은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김부식 [삼국사기] 中


국내 영화산업에서 드물게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 '안시성'이 손익분기점인 541만명을 돌파하고, 안방극장으로 향했다. 안시성은 제작비가 무려 215억원이 투입된 사극 블록버스터다. 그 제작 규모와 역사적 배경 등으로 인해 개봉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막상 뚜껑이 열린 직후 빠르게 관객수를 늘려나갔다. 그러나 일각에서 기대됐던 1000만 관객에는 미치지 못했고, 가까스로 손익분기점을 넘는 최종 흥행실적을 거뒀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좋았다. 대규모 전투신과 배우들의 연기 등에서 호평이 주를 이뤘고, 무엇보다 그동안 잘 다뤄지지 않았던 고구려 시대, 그 시대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전쟁 중의 하나로 꼽히는 안시성 대첩(645년)을 생동감 있게 구현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아울러 '당나라'로 대변되는 중화 패권주의에 과감히 대적하고 승리하기까지 했던 역사를 통해 국민들은 '명량' 이후 다시 한번 국가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더욱이 상대는 청나라 강희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2대 명군 중의 하나로 거론되는 '당 태종 이세민'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사극 영화에는 언제나 팩트와 픽션이 혼재한다. 팩트를 기본으로 하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영화적 상상력인 픽션을 적절히 가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 인해 역사 왜곡 논란은 매번 사극 영화에 뒤따라오는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 시대도 아닌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사극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큰 모험이자 도전이었을 수 있다. 더욱이 안시성 전투는 정사에 관련 기록이 몇 줄 밖에 나와있지 않고, 양만춘이라는 이름도 없이 그저 '안시성주'로 기록돼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영화 안시성은 기본적인 팩트를 바탕으로 그 시대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구현해 관객들에게 고구려와 안시성, 양만춘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제 스크린에서는 내려왔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진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 안시성에서의 5가지 결정적 장면들의 팩트와 픽션을 돌아봤다.

■치명적 패배...주필산 전투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주필산 전투는 안시성 인근 벌판에서 벌어진 고구려 군과 당나라 군의 대규모 회전이다. 개모성과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잇따라 함락시키고 안시성까지 다다른 당나라 군을 막기 위해 연개소문은 고연수 등을 선봉으로 15만의 원군을 파견했다. 안시성마저 무너지면, (다음 타자인 '오골성'이 있기는 했지만) 요동 방어선이 사실상 붕괴됨에 따라 당나라 군이 수도 평양으로 진군하는 데에 있어 웬만한 걸림돌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고구려 입장에선 주필산에서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초반엔 고구려 군이 당나라 군을 몰아붙이는 양상이었지만, '전쟁의 신'이라 불리우는 당 태종 이세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미끼를 던져 고구려 군을 유인하고 포위한 다음 총공격을 감행해 수많은 고구려 병사들을 그 자리에서 전사시켰다. 고구려 군이 주필산에서 또 한 차례의 치명적 패배를 당하면서 안시성은 고립됐고, 사실상 단독으로 당나라 군대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관계
안시성 대첩 못지 않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고구려 말기 대표적인 두 영웅인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관계가 과연 어떠했는지이다. 당시 연개소문은 대당 군부 강경파의 우두머리이자 대막리지로써 고구려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영류태왕의 온건 외교에 반대하며 쿠데타를 일으켰고, 대신 수백명과 영류태왕을 시해했다. 이 때 양만춘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사에는 당 태종이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정예하며 성주는 재능과 용맹이 있어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복종하지 않으므로, 막리지가 안시성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맡기었다"라고 언급한 대목이 있다. 이 기록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순 없지만, 적어도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관계는 껄끄러웠으며 크게는 '정적'이라 불리울 정도의 관계로도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그래도 '당'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두 사람이 연대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토산 전투
안시성 대첩이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당나라 군의 공격은 보다 집요해지고 거세진다. 공격의 백미는 역시 토산이다. 계속된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 태종 이세민은 토산 건립을 명했고, 약 2개월에 걸쳐 토산이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나왔듯 토산 건립에는 수많은 인력이 동원됐는데, 그 수는 연인원 약 50만명으로 추산된다. 영화에서는 당나라 군이 심혈을 기울인 토산이 완공을 앞둔 상황에서 인부들이 지반을 무너뜨려 토산이 붕괴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토산이 붕괴된 뚜렷한 원인이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토산이 안시성 쪽으로 붕괴됐고, 고구려 군사들이 재빠르게 토산을 점령해 성 방어를 보다 용이하게 만들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이세민, 눈에 화살을 맞다
고구려 군이 토산을 점령한 후 고구려 군과 당나라 군 사이에는 토산을 둘러싸고 일대 공방전이 벌어진다. 영화에서는 이 때 양만춘 장군이 최후의 일격으로 과거 고주몽(동명성왕, 고구려의 시조)이 사용했던 대궁을 가지고 이세민의 눈에 화살을 명중시킨 것으로 나온다. 중국측이 기록한 정사에는 이같은 내용이 나와있진 않지만, 적지 않은 야사와 구전에는 이같은 내용이 기정사실처럼 담겨있다. 심지어 고려시대 목은 이색의 시에도 "이(고구려)는 주머니 속의 물건이라더니, (이세민) 눈이 흰 깃(화살)에 떨어질 줄 누가 알았으랴"라는 대목이 나온다. 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양만춘 장군이 요택을 통해 퇴각하는 이세민의 눈을 향해 지근거리에서 화살을 대고 쏴 명중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이세민의 사망 원인이 이 때 입은 눈 부상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온바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이같은 주장들은 그만큼 안시성 대첩을 통해 이세민과 당나라 군이 큰 타격을 입었고, 고구려 군이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는 것의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안시성 대첩 그 후
안시성 대첩은 제1차 고당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4년 뒤인 649년 숨졌다. 이세민은 유언으로써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로부터 잠시간의 평화가 유지된 후 661년 제2차 고당전쟁이 발발한다. 이때까지 연개소문은 생존해 있었고, 다시금 출전해 사수에서 당나라 10만 대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연개소문도 죽음을 맞이한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연개소문 아들들 간의 내분과 나당 연합군의 협공으로 결국 668년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안시성 대첩 이후 양만춘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제2차 고당 전쟁 때도 안시성주로써 재임하며 당나라 군에 맞섰는지, 아니면 그 전에 사망했는지 등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다만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안시성은 독립적으로 당나라 군에 항전하며, 과거 당 태종의 군대를 물리쳤던 그 용맹과 기상을 끝까지 발휘하는 모습을 보인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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