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 구하라 아닌 ‘최종범 사건’

오은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0.11 17:13

수정 2018.10.11 17:13

[기자수첩] 구하라 아닌 ‘최종범 사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이 문구를 보고 자동적으로 코끼리를 떠올렸다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그의 저서를 통해 단어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순간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특정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이미 규정돼 버린 직관적 인식의 틀을 '프레임'이라고 한다. 프레임은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물이나 사건의 이름 짓기 등 다양한 곳에서 프레임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1986년 경기 부천경찰서 조사계 문귀동 경장은 대학생 권인숙을 성고문했다. 이 사건은 '권인숙 성고문사건' '권양 성고문사건' 등으로 현재까지도 불리고 있다. 문귀동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투운동이 본격화된 '여검사 성추행' 사건 역시 피해자가 맨앞에 드러난다.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사건' 역시 피해자 신원만 드러난 채 온라인을 떠돌고 있다.

대부분의 성범죄가 그렇듯 가해자보다 피해여성이 먼저 회자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훨씬 예민하고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이름과 신원이 먼저 거론될수록 피해자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끊임없이 소비된다. 간접적인 2차 피해, 3차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최근 유명 여가수의 남자친구가 폭행시비 이후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리벤지 포르노 논란이 일고 있다. 유튜버가 성추행과 사진유출 피해를 봤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뜨거운 논란 속에 재판이 진행 중이다.

피해여성 이름이 가장 먼저 불리던 이 사건들을 최근 '최종범 사건' '스튜디오 성폭력사건'으로 바꾸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등 여성단체에선 이미 가해자와 사건유형 이름 등으로 불리고 있다. 피해자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의 심각성 등을 부각시킨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인 변화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훨씬 유명한 사건이라면 처음 퍼지는 'OOO사건'이라는 네이밍을 사전에 막긴 어려울 수 있다. 사이버상에서는 더 그렇다.
하지만 계속해서 본인의 이름이 회자되는 피해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본다면 이런 변화의 목소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onsunn@fnnews.com 오은선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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