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칼럼]

한글날 읽는 보도자료 ∑#?π≠φ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0.08 16:29 수정 : 2018.10.08 16:29

부동산 대책에 RTI·DSR 등 암호 같은 약어가 소통 막아..'오컴의 면도날' 경구 새겨야




오컴의 면도날이란 말이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단순한 게 옳다는 뜻이다. 오컴(Ockham)은 14세기 영국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자이자 철학자인 오컴 윌리엄을 말한다. 그는 배배 꼬인 문장을 싫어했다.
가정이 덕지덕지 붙은 글도 경멸했다. 그런 문장, 그런 단어를 면도날로 쳐냈다. 그래서 오컴의 면도날을 간결성의 원칙이라고도 한다.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오컴의 면도날을 쥐고 싶어진다. 지난달에 발표한 9·13 대책을 보자. 투기지역이 있고 투기과열지구가 있다. 차이가 뭘까. '투기'가 붙었으니 둘 다 나쁜 놈 같은데, 누가 더 나쁜 놈인지 모르겠다. 조정대상지역도 있다. '투기'가 안 붙었으니 그중 착한 지역인가?

종부세(종합부동산세)는 공정시장가액비율을 더 올리기로 했다. 공시가격은 점진적으로 현실화한단다. 혹시 나만 공정시장가액비율과 공시가격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얼뜨기인가? 그래도 명색이 경제신문 기자인데 아리송할 따름이다. 금융대책을 보면 약어가 춤을 춘다. LTV, DTI는 그나마 낯이 익다. 그럼 이건 어떨까. "LTV 규제가 적용되어도, RTI 비율을 준수하여야 함." 와, 정말 미치겠다. 저 보도자료를 쓴 공무원 말고 저 문장을 이해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저 공무원은 과연 저 뜻을 알까.

미국 경영 컨설턴트인 리처드 코치는 기업 100년사를 꿰뚫는 성공전략으로 '무조건 심플'을 꼽는다. 모든 성공 뒤에는 단순함이 있다는 것이다. 포드자동차는 1900년대 초 모델T로 대성공을 거뒀다. 모델T는 간단한 구조, 싸고 강한 재료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 해 1000대도 팔지 못하던 포드는 이 모델 덕에 1920년 한 해에만 125만대를 팔았다. 코치는 "단순화 전략이야말로 비즈니스라는 생태계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있다"고 말한다.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은 복잡오묘하다. 청와대는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라는 3개의 축이 이른바 J노믹스를 떠받친다고 설명한다. 최저임금 정책이 논란을 부르자 최저임금은 소득주도성장 전략의 한 귀퉁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 소득주도성장 역시 J노믹스를 이루는 한 개 축에 불과하다. 이러니 소득을 중시하는 청와대 정책실장과 혁신을 중시하는 경제부총리가 자꾸 부닥친다.

J노믹스에 비하면 태평양 건너 트럼프노믹스는 단순 명쾌하다. 오로지 성장이다. 기업들 실컷 뛰어놀라고 세금을 왕창 깎았다. 트럼프노믹스라고 왜 허점이 없겠는가. 하지만 간결성의 원칙에서 보면 J노믹스보다 한 수 위다. 적어도 트럼프노믹스는 3개 축이 어쩌구저쩌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일본 아베노믹스도 마찬가지다. 일본인들은 아베 총리가 어떤 경제정책을 펼지 눈을 감고도 다 안다.

말을 배배 꼬고 자기들만 아는 전문용어를 쓰는 건 힘 있는 자들의 특징이다. 의사들이 그렇고, 판사들이 그렇다. 그런 의료용어나 판결문도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한다. 경제관료들이 영어나 알파벳 약어를 좋아하는 건 오랜 악습이다. 우리말로 쉽게 고치려고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RTI(Rent To Interest·임대업 이자상환 비율), DSR(Debt Service Ratio·총부채 원리금 상환 비율) 같은 암호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정책은 소통이다. 효과를 보려면 듣는 사람이 척하고 알아들어야 한다. 군더더기는 면도날로 쳐내자. RTI·DSR이 사라진 정부 보도자료를 보고 싶다. 오늘은 한글날(9일)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네이버채널안내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