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고건과 황교안'의 데자뷔… '총리 대망론'은 이뤄질까

한영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9.15 12:19

수정 2018.09.15 12:19

[역사 그리고 오늘] 총리 출신 대권 후보들
'행정의 달인' 고건, 지지층 분열되며 대선 포기
'실세총리' 이해찬, 참여정부 무너지며 본선 진출도 실패
'대쪽' 이회창도 한계 보이며 '대선 3수' 실패
황교안의 가능성과 한계는?
고건 전 국무총리 /사진=연합뉴스
고건 전 국무총리 /사진=연합뉴스

■고건이 쏘아올린 대권 꿈

김영삼 정부 때 이미 국무총리를 지내고 김대중 정부 때는 민선 서울특별시장까지 지냈던 그는 노무현 정부의 첫 국무총리가 됐다.

이 시기, 민주화 이후 최초의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기도 했다. 2004년 3월 16대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의결해,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것. 2004년 5월 12일 탄핵 기각이 결정돼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한 후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건 전 국무총리는 유력한 대권 주자로 올라섰다. 오랜 기간 다양한 정치세력에서 행정력을 발휘한 그였다. 특히 2달여 동안 대통령 대리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노무현 정부가 '아마추어 정부'라고 공격당하던 당시, 여권에서는 중도층까지 공략할 수 있는 매력적인 카드였다.

차기 대권주자 여론조사에서 한동안 1위 자리도 유지했다.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3강을 형성했다. 여권에서는 정동영, 김근태, 유시민 등을 가볍게 제치고 압도적인 지지율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전 총리의 지지세력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창당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 1월 16일, 고 전 총리는 "대결적 정치구조 앞에서 저의 역량이 너무 부족함을 통감한다"고 밝히며 대선 불출마 선언을 발표한다. 관료 출신이란 한계 때문인지, 2006년 하반기부터 차기 대권 여론조사에서 1위 자리를 내줬다.

그해 말 노무현 대통령의 '저격'이 결정적이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고건 씨 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라며 "좌우대립 속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길 기대해서 좌우 여러 진영을 거친 그를 총리로 지명한 것인데, 그 부분에서 실패하고 고립된 것 같아 아쉽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노 대통령의 저격에, 고 전 총리는 "자기부정"이라며 발끈했지만, 여권 내에서도 지지층이 갈리며 동력을 잃었다.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민주당계 정당 후보는 영남에서 어느정도 지지를 받아야 당선될 수 있는데, 자신이 호남 출신이라 그런지 여론조사상 그 영남에서 지지율이 별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아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아보여 포기했다"고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한 이유를 밝혔다.

지난 1973년 박정희 대통령컵 아시아 축구대회 선수입장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김종필 전 총리가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973년 박정희 대통령컵 아시아 축구대회 선수입장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김종필 전 총리가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종필·이해찬 등 실세총리도 대권에 실패

국무총리 출신의 대권 행보는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정부에서의 김종필 국무총리가 원조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반 이상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 총리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 대통령이 된 후, 그는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단행해버리면서, 김 총리가 바랐던 대통령의 꿈은 날아갔다. 물론 유신 이후에도 박정희에게 적극 협조하며 국무총리직을 장기간 유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 외교, 국방, 중화학공업만 빼고 나머진 모두 임자가 알아서 하라"며, 김 총리에게 신임을 보내며 실세 총리로 군림하기도 했다. 결국 1975년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총리직을 사임한다.

이후에도 '직선 대통령'이 되기 위해 출마하지만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에게 밀려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정치인'으로 남게 된다.

민주화 이후 대표적인 실세총리로 불리던 이해찬 국무총리도 마찬가지였다. 고건 전 국무총리 퇴임 이후, 그는 노무현 정부의 두 번재 국무총리에 오른다.

세종시 건설을 지휘하는 등 그는 실세 총리로서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인사에도 영향력을 끼쳐, 청와대와도 자주 충돌했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임명될 때가 대표적이었다. 이해찬 총리는 유시민 입각을 반대해 국무위원 제청권을 행사하면서 대통령과 정면으로 맞섰다.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대통령 측근과 사조직 발호를 막아야 한다"고 지시하며, 대통령의 권한인 청와대 수석의 지휘권에 월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후 강원도 양양군에 산불이 번지는 와중에도 골프를 친 사건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논란이 커지자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노무현 정부가 몰락하는 와중에도, 친노세력을 결집해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선거 경선에 나섰지만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에 밀려 본선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지난 1997년 10월 22일 당시 이회창 전 신한국당 총재가 여의도 당사에서 특별기자회견을 갖고 명예총재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997년 10월 22일 당시 이회창 전 신한국당 총재가 여의도 당사에서 특별기자회견을 갖고 명예총재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회창 이후에도 '총리 잔혹사' 이어져

총리 출신으로 가장 강력한 대권주자로 오른 이는 '대쪽' 이회창이었다.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감사원장 등을 지낸 그는 1993년 12월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이회창 국무총리는 헌법으로 위임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는, 새로운 총리상을 만들고자 했다. 대통령의 방탄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국무총리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소신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 김영삼의 최측근인 최형우 의원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125일, 짧은 기간 국무총리에 있었지만 그때의 모습이 이회창 총리를 대권주자로 올려놓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 총리가 원하던 국무총리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수시로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총리가 제외되자, 이 총리는 "통일부 장관 등 회의 구성원들이 총리의 직할"이라는 법적 근거를 들며 "총리의 승인을 받지 않은 회의는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김영삼 대통령과 마찰을 빚었다. 결국 이 총리는 자진 사퇴하는 형식으로 사실상 경질됐다.

그는 사퇴하면서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라는 말을 남기며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것처럼 '가장 강력한 패자(敗者)'로 역사에 남는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 1.6%포인트 차, 2002년 16대 대선에서 2.3%포인트 차로 패했다. 두 차례 모두 3위 후보 때문에 승리를 내줬다. 1997년엔 보수 후보가 분열되면서 표가 분산됐고 2002년엔 2·3위 후보간 단일화로 역전당했다. 이 전 총리에게도 단일화의 유혹이 있었지만 원칙을 내세우며 거부했다. 자신을 대권주자로 만든 '대쪽'스러움이 결국 마지막 관문에서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이후 많은 총리 출신 정치인들이 대권을 꿈꿨지만 매번 무산됐다. 김영삼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이홍구 전 총리도 1997년 대선 국면에서 신한국당의 '9룡' 중 한 명으로 꼽혔지만 당내 경선 전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수성 전 총리도 2002년 대선 당시 '화합과 도약을 위한 국민연대' 소속 후보로 출마했지만 대선을 엿새 남기고 '국민 화합의 큰 마당을 열어야 할 대선이 정쟁과 이전투구식 격돌이 됐다'며 뜻을 접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총리를 지낸 정운찬 전 총리도 충청 출신에 경제 전문가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총선이나 대선 등 주요 정치일정이 있을 때마다 영입 대상에 올랐지만 현실정치 문턱에서 매번 '유턴'했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왼쪽)가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황교안 전 국무총리(왼쪽)가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리고 황교안이 쏘아올릴 대망론

그리고 2018년. 계절마다 오는 계절풍처럼, 또 다시 '총리 대망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탄생한 문재인 정부, 그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50% 내외로 추락할 때,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이자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1년 4개월 만에 잠행을 마치고 공개석상에 자리를 드러낸 것.

황교안 전 총리는 지난달 수필집 ‘황교안의 답(청년을 만나다)’을 발간하며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공교롭게도 여론조사에서 범야권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1위를 기록한 다음이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를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위한 신호탄'이라고 해석했고, 김병준 비대위가 막을 내리는 내년 초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황교안 전 총리를 보면 고건 전 총리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자신이 속한 진영에 마땅한 대선 후보가 부재하다는 점, 관료 출신으로 현실정치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이 비슷하다.

다른 점도 존재한다. 고 전 총리는 정치적 기반이 부족했고, 이 때문에 현실 정치권과 거리를 뒀다. 이에 반해 황 전 총리는 자유한국당 친박세력을 멀리하지 않는다. 출판기념회에는윤상현 의원을 비롯한 자유한국당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황 전 총리에 힘을 보탰다.

이 부분이 황교안의 가능성이자 한계로 지목된다.
한 보수 논객은 "황 전 총리의 행보를 보면 고건 전 총리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모습"라며 "오갈 데 없는 친박계 의원들이 우군이 될 수 있는 데다 대구·경북이라는 탄탄한 지역 기반을 챙길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제3지대에서 대안 세력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기존 정당에 참여해 당권을 거머쥐고 세를 모아 대권에 도전한다면, 고건 전 총리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차별화된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 관계자는 "이미 박근혜 대통령이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단죄가 된 상태에서, 박근혜 정부를 떠오르게 하는 황교안 전 총리는 대선주자로 한계가 있다"며 "친박세력의 얼굴 마담으로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보수진영 전체를 끌어갈 잠룡으로 클 지는 미지수"라고 내다봤다.

fair@fnnews.com 한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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