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소외된 이웃이 있다면 밥 싣고 달려갑니다" 사랑 퍼주는 요리사

오은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8.23 16:26

수정 2018.08.24 09:35

[감동시리즈-우리함께]⑧채성태 사랑의밥차 대표
22년전 낚싯배 전복사고서 구사일생 "남을 위해 살겠다" 굳은 다짐
이후 18년간 봉사 '밥차의 원조'..태안에선 1500명분 두달 내내 준비
지역센터부터 日원전사고 현장까지 '한끼' 필요한 전세계 곳곳 누벼
채성태 사랑의밥차 대표는 '일식요리의 달인'이자 '봉사의 달인'이다. 채 대표는 "지난 1996년 목숨을 잃을뻔한 낚싯배 사고 이후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봉사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사진=박범준 기자
채성태 사랑의밥차 대표는 '일식요리의 달인'이자 '봉사의 달인'이다. 채 대표는 "지난 1996년 목숨을 잃을뻔한 낚싯배 사고 이후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봉사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사진=박범준 기자

채성태 대표는 사랑의밥차를 타고 어디든 달려간다. 사진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현장(2011년 4월).
채성태 대표는 사랑의밥차를 타고 어디든 달려간다.
사진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현장(2011년 4월).

전남 완도 경로잔치(2015년 5월)
전남 완도 경로잔치(2015년 5월)

장애아동과 함께한 제주도 자원봉사(2015년 8월)
장애아동과 함께한 제주도 자원봉사(2015년 8월)


"제 별명이 교주에요. '성태교'라고. 밥차에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거든요."

지난 16일 서울 용산의 한 일식집에서 만난 채성태씨(51)는 푸근한 인상의 '동네 삼촌' 같았다. "점심도 드시고 가실거죠?"라며 기자를 불러 앉힌 그는 베푸는 일이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일식용 앞치마를 입고 주방기구를 손에 들자 바로 20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 요리사 포스가 뿜어져 나왔다.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그의 모습에서도 숨길 수 없는 '일식 요리 달인'의 아우라가 엿보였다. 채씨가 요리에서만 달인은 아니다. '봉사의 달인'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2001년부터 운영해온 '사단법인 사랑의밥차'의 대표다. 지금은 밥차 봉사가 많아졌지만, 그가 원조다. 18년 동안 어려운 이웃을 위해 따뜻한 밥을 해온 사랑의 밥차는 고정적으로 꾸준히 활동하는 자원봉사자만 200명이 넘는다. 밥차도 4대로 늘어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채씨는 밥차 봉사에 대해 "본업인 식당 운영보다 더 소중하고 신경 쓰이는 일"이라고 했다.

"소외된 이웃이 있다면 밥 싣고 달려갑니다" 사랑 퍼주는 요리사


■목숨과 맞바꾼 밥차 봉사

채씨가 밥차 봉사를 시작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바로 생명과 맞바꾼 일이다. 1996년 그는 친구들과 낚시를 하러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러다 낚싯배가 뒤집히는 아찔한 사고가 났다. 추운 겨울이었던 당시 그는 죽기 살기로 뭍을 향해 헤엄을 쳤다. 잠깐이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생애 가장 긴 시간을 보낸 채씨는 '살 수만 있다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봉사하며 살겠다'고 신에게 맹세했다. 그렇게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

이후 충남 태안에서 전복 요리 전문점을 열었다. 전복 요리를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요리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장사가 잘 됐다. 연예인부터 정·재계 인사까지 방문하며 입소문을 탔다. 서울 이태원에도 가게를 차렸다.

그러던 중 노인 자원봉사에 필요하다며 전복죽 50인분 협찬 요청이 들어왔다. 다 식은 죽을 먹는 어르신들을 보며 2년 전 목숨을 담보로 한 약속이 떠올랐다. '외식이 힘든 사람들을 위해 직접 가서 따뜻한 밥을 해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2001년, 3.5t짜리 밥차 트럭을 구입하면서 생각은 현실이 됐다.

■"지역센터부터 히말라야까지, 밥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죠"

채씨는 사랑의 밥차를 타고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봉사 현장을 누볐다. 지난 2007년 충남 태안 기름유출사건 때는 현장 자원봉사자 1500명의 식사를 두 달간 매일 준비했다. 밥차 단 2대로 한 일이다. 2006년 강원도 진부면 물난리 땐 가는 길에 발생한 산사태도 뚫고 현장으로 들어갔다. 마을 주민 수백명의 삼시 세끼를 채씨 포함 단 2명이서 지었다. 시간이 없어 차에 스티로폼을 깔고 쪽잠을 잤다. 마을 어머님들이 설거지 등을 도왔다.

점점 봉사 규모가 커지면서 재난 현장 등으로 직접 어려운 이웃을 찾아 나섰다. 노숙자 보호센터, 지역 장애인 센터, 아동센터 등 맛있고 따뜻한 음식이 필요한 곳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먹는 사람이 다양한 만큼 행사 성격에 따라 메뉴도 달라진다. 채씨는 "속도 마음도 어려운 분들에게는 처음부터 거친 음식을 먹일 수 없기 때문에 죽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어 단백질 보충을 위해 고기 반찬 등을 천천히 내놓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 체육대회 같은 경우는 간을 좀 짜게 한다. 많이 움직이고 땀을 빼니까 염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오랜 식당 운영과 봉사 활동 끝에 얻은 꿀팁이다.

채씨는 본인의 별명을 '교주'라고 했다. 봉사 활동에서 오는 보람뿐 아니라 봉사하며 알게 된 사람들과 같이 즐겁게 지내는 데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50명 내외의 자원봉사 수요자들이 모여있는 현장에서는 함께 밥도 먹고 얘기도 하고, 심지어는 노래도 부르며 친해진다.

채씨는 "'교주' 별명은 히말라야를 함께 갔다 온 장애를 가진 친구가 만들어줬다"며 영상을 하나 보여줬다. '사랑하는 삼촌에게'로 시작하는 이 영상은 장애 아동이 직접 만들어 채씨에게 선물한 작품이다. 영상 속엔 히말라야에서 함께한 추억이 담긴 사진들과 함께 '삼촌이 보여주신 너무너무 큰 사랑에 더 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친구의 다짐이 담겨 있었다. 채씨는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지만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취지로 기획해 다녀온 캠프였는데, 오히려 내가 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뿌듯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어려움 있지만…전국 팔도에 지부 내는 게 꿈"

봉사에만 전념하고 싶지만 오래 같은 일을 하다보니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다. 후원이 항상 넉넉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땐 오랜 경험과 인맥이 빛을 발한다. 전복 요리 전문점을 할 때부터 쌓아둔 정·재계, 연예계 인맥이 오히려 나서서 후원하고 싶다는 일도 있다.

좋은 일에 쓰여야 할 후원금이지만, 사랑의 밥차 이름을 도용해 후원금을 받으려는 다른 단체들 이야기를 들을 때면 채씨는 "죽고싶은 심정도 든다"고 토로했다. 채씨는 "후원금을 받은 적이 없는데 영수증을 끊어달라는 연락도 종종 온다"며 어려움을 내비쳤다. 그래서 '사랑의 밥차'라는 이름을 다른 곳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난 2004년엔 특허신청도 냈다. 자꾸 같은 일을 당하는 채씨를 대신해 지인이 도움을 줬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채씨는 봉사를 '행복'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음식을 해주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정말 좋다"며 "욕심을 내려놓고 적당히 벌며 적당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무지하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채씨는 지금도 소득의 많은 부분을 사랑의 밥차를 위해 사용한다.

채씨의 꿈은 현재 포항에 있는 지부 외에도 전국에 8개의 사랑의밥차 지부를 내는 거다. 그는 "전국 팔도에 하나씩이면 더 좋죠"라며 허허 웃었다. 언젠가는 비영리 사단법인에 사랑의 밥차를 내놓을 계획도 갖고 있다. 밥차는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이 모든 계획엔 사랑의 밥차에 담긴 봉사의 진정한 의미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그의 바람이 담겼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채씨의 식당은 지인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음식과 봉사를 매개로 모인 수많은 단골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성지가 됐다.
"스스로 봉사하며 살겠다고 한 약속에서 시작했지만, 이젠 요리와 봉사가 제 삶이 됐죠"라고 말하는 채씨의 얼굴엔 그가 말하는 행복이 듬뿍 묻어나 보였다.

onsunn@fnnews.com 오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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