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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로]피서지에서 생긴 일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8.13 16:45

수정 2018.08.13 17:36

[윤중로]피서지에서 생긴 일

1987년 8월 절정의 휴가철 중 어느 날. 경남 창녕군 부곡하와이 정문 앞 세 명의 여고생은 망연자실했다. '갑작스러운 노동쟁의로 당분간 문을 닫습니다.' 굳게 잠긴 출입구 철문엔 이 안내문만 보란 듯이 나부끼고 있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동시다발 쏟아진 노사분규 소식은 저녁 9시 뉴스를 통해 대강은 전해들었지만, 그 거스를 수 없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물결이 자신들의 여름방학 물놀이 일정까지 타격을 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던 터였다. 셋 중 한 명이었던 나는 허망한 마움에 불쑥 다른 제안을 했다. "부산이라도 갈까?"

세 명이 탔던 부산행 버스는 거의 만석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사상역에 도착해 비로소 셋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시작했다. '이제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이라면 스마트폰을 열어 수십가지 정보 중 하나를 고르면 되지만, 당시는 인터넷은커녕 개인용 컴퓨터도 쓰이지 않았던 때다. 결국 현지인 몇몇의 자문을 얻어 최종 선택한 곳이 인근 수영장이었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간단한 군것질을 했고, 거기서 버스를 타고 30여분 더 갔던 거 같다. 뒤죽박죽 여행길이었지만 셋은 모두 신바람이 났다.

원없이 놀다 집으로 갈 채비를 하려는데, 이런. 돌아갈 경비를 따로 모아놓은 지갑이 온데간데 없었다. 순식간에 집으로 갈 차비도 없는 처지가 됐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갑을 포장마차에 두고 온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을 셋은 내린다. 주머니 동전을 탈탈 털어 다시 그곳으로 갔지만 주인은 그런 생김새의 지갑은 구경도 못했다며 안쓰러운 눈으로 셋을 봤다.

부산으로 전학갔던 초등학교 친구 얼굴을 떠올린 건 밖이 한참 어둑어둑해졌을 무렵이었다. 셋 중 나를 포함한 두 명이 그 친구와 유년 시절 절친한 관계였다. 하지만 연락을 어떻게 하지? 전학 이후 편지는 주고받은 적이 있지만 집 전화번호를 갖고 있진 않았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거듭하던 중 용케 그 친구 아버지 성함을 기억해냈다.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114번 교환원에게 이름을 대니 번호 열두 개를 불러줬다. 열한 번의 실패, 그리고 열두 번째 마지막 통화에서 그토록 찾던 친구와 운명적 교신에 성공했다. 셋은 그 집에서 이틀을 더 묵었으며 두둑한 차비를 얻어 무사히 집으로 갔다.

그때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건만, 나는 피서철만 되면 그날들이 생각나 빙그레 웃곤 한다. 스마트폰 문명이 도착하기 전이었던 시대, 그래서 더 애틋했고 간절했으며 정겨웠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터치 몇 번으로 10년 전, 20년 전 친구 근황을 바로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게 그렇게 행복한 것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요즘 여고생 학부형들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하루 종일 스마트폰에 목매고 사는 딸의 모습을 볼 때라고 한다. 기술혁명은 인류가 꿈꾼 편리함을 단숨에 가져다줬지만 행복까지 데려오진 않았다.
나머지는 결국 각자의 몫. 오늘 하루도 행복을 찾아 나서는 그 길 위에 건투를 빈다.

jins@fnnews.com 최진숙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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