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에 처박힌 레인지로버 운전자는 '멀쩡'.. 숨겨진 트릭 찾았다

연합뉴스 입력 :2018.07.09 06:40 수정 : 2018.07.0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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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턴하려다 실수로 기울어져 '풍덩', 뒷문 열려 긴급탈출" 보험금 받아
공학연구소 "속도·각도상 주행중 빠지는 건 불가능…천장에도 흔적 없어"









저수지에 뒤집혀 처박힌 레인지로버…운전자는 어떻게 멀쩡했나

"유턴하려다 실수로 기울어져 '풍덩', 뒷문 열려 긴급탈출" 보험금 받아

공학연구소 "속도·각도상 주행중 빠지는 건 불가능…천장에도 흔적 없어"

(서울=연합뉴스) 홍정규 기자 = 지난 3월 7일 깊은 밤이었다. 충청남도의 한 저수지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A(43)씨는 저수지 옆 비포장도로로 레인지로버를 몰았다. 주위는 가로등 하나 없어 칠흑 같았다.


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려고 속력을 줄이면서 도롯가로 붙었다. A씨는 안전띠를 매지 않은 상태였다. 담배를 피우느라 창문은 열어뒀다. 갑자기 '덜컹'하면서 차가 폭 6m 도로 옆 비탈로 빠졌다. 당황해 운전대를 제대로 돌리지 못했다. 차는 옆으로 기울어 구르더니 뒤집힌 채 저수지에 처박혔다.

빠진 곳의 수심은 나중에 재보니 80∼90㎝였다. 열린 창문으로 물이 들어왔다. 다행히 해치백 구조인 레인지로버의 뒷문이 열렸다. A씨는 물속에서 몸을 뒤집었다. 천장을 발판삼아 어둠을 더듬어 뒷문으로 탈출했다. 저수지를 빠져나와 보험회사에 '전손처리'로 사고 접수했다.

차량 가입 보험사는 KB손해보험이었다. 이 같은 진술에 따라 KB손보는 A씨에게 보험금 약 3천300만원을 지급했다. 그런데 현장을 조사한 직원이 "뭔가 석연찮다"고 보고했다. 그는 전직 경찰관들로 구성된 SIU(Special Investigation Unit·보험사기조사팀) 소속이었다.

일단 "아무리 담배를 피워도 창문 4개를, 그것도 비가 오는데 다 열어놓을 필요가 있었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또 차를 건진 구조사는 침수된 차에서 자동개방 시스템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어떻게 뒷문이 저절로 열렸을까?"

무엇보다 침수사고를 겪은 차에서 빠져나온 운전자치고는 외견상 너무 멀쩡해 보였다. 사고 현장에는 CC(폐쇄회로)TV가 없었지만, 주변 CCTV에는 사고 발생 직후 차량 3대가 빠져나간 모습이 찍혔다. '사고'가 아닌 '사건' 같다는 의심이 짙어져 한 공학연구소에 현장 분석을 의뢰했다.

도로와 저수지 사이 비탈면의 직선거리는 2.0m, 수면에서 도로까지 높이는 1.2m였다. 비탈의 경사는 31˚, 비탈에 난 바퀴 자국과 도로 가로방향 사이는 48˚로 측정됐다. 그렇다면 저속으로 달리던 차가 이런 흔적을 남기고 저수지에 뒤집힌 채 빠질 수 있을까.

연구소가 분석한 여러 공학적 근거는 A씨의 주장과 배치됐다. 우선 비탈에 생긴 바퀴 자국 거리가 레인지로버의 앞뒤 바퀴 축간 거리보다 짧았다. 주행하면서 옆으로 미끄러지거나 뒤집힌 것으로 보기 어려웠다.

결정적 근거는 31˚ 비탈로 차가 빠지면 뒷바퀴와 앞바퀴의 진행방향이 순간적으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바퀴 자국은 4개가 생겨야 한다. 그런데 현장에는 2개밖에 없었다.

이런 바퀴 자국이 생기려면 48˚ 각도로 도로 중앙에서 저수지 방향으로 차를 몰았어야 했다. 그런데 A씨는 분명히 "도롯가로 붙었다"고 했다. 연구소는 "운전자 주장대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A씨가 진술한 탈출 경위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분석됐다. 레인지로버의 중량, 빠질 때의 속도를 고려하면 차가 뒤집힐 때의 회전력 때문에 A씨 상반신은 조수석 쪽으로 쏠리고, 열린 창 4곳으로 물은 급속히 들어오게 돼 있다.

뒷문으로 탈출하려면, 좌석 머리 지지대와 천장 사이의 틈(15㎝)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는 머리가 물에 잠긴 채로 몸을 뒤집어 천장에 엎드리고, 운전석과 조수석 등받이 사이로 이동해 기어서 나와야 했다. 그런데 섬유 재질의 천장에는 이런 움직임을 뒷받침할 흔적이 없었다.

KB손보는 이런 증거와 함께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수사 결과 A씨와 공범들이 가담한 보험사기 혐의가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단독사고를 낸 레인지로버 주인은 A씨 친척이 운영하는 카센터에 수리를 맡겼다.

A씨 친척은 차주에게 "중고차로 비싼 값에 팔아주겠다"며 차를 넘겨받아 A씨에게 넘겼다. 그는 여기저기 손상된 중고차의 시세(2천만원)보다 전손처리 보험금을 받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친구 3명과 함께 차를 저수지로 밀어 넣은 것이다.

경찰은 이들 5명을 기소 의견으로 최근 검찰에 송치했다. KB손보 관계자는 9일 "SIU가 이처럼 과학수사를 방불케 하는 공학조사로 보험사기를 밝혀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zhe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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