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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법원의 힘은 신뢰에서 나온다

안삼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6.05 16:49

수정 2018.06.05 16:49

[여의나루] 법원의 힘은 신뢰에서 나온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의회는 돈지갑이 있고, 정부는 칼이 있는데, 사법부는 3권 분립의 한 부분이라 해도 의회나 정부에 견줄 만한 권력이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법부가 국가의 한 축을 맡고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사법부의 판단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존중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6년 대법원이 펴낸 '미디어 가이드북'에 실린 당시 고영한 법원행정처장의 발간사 일부분이다. 사법부의 존립 기반은 국민의 신뢰라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해밀턴은 돈이나 칼이 없는 사법부는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침해할 위험성이 가장 덜한 존재라고 보았다. 사법부는 힘이나 의지를 갖지 않고 단순히 판단만 하는 존재라는 말도 했다.
해밀턴의 말을 두고 사법부는 의회나 정부에 비해 가장 힘이 약한 기관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역사는 그렇지 않음을 증명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의회나 정부의 행위가 헌법과 법률에 위반되는 경우 이를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선언했다. 해석을 통해 헌법에 규정되지 않은 '사법심사' 권한을 스스로 확보한 것이다. "법이 무엇인지를 선언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임을 강력히 설파한 초대 대법원장 존 마셜의 발언은 그 신호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확립된 이 원리에 따르면 사법부는 가장 약한 기관이 더 이상 아니다. 법원은 돈과 칼로 상처 입은 국민의 최종적인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 국민이 마지막 기댈 곳은 법원이라는 믿음이 그래서 중요하다. 사법부가 최종 결정권자로서 국민의 신뢰와 존중을 받을 때 3권 중 가장 강력한 기관일 수 있다. 그 믿음이 깨질 때 법원은 돈도 칼도 없는 허약하고 초라한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사법부가 중대기로에 섰다. 재판 거래, 재판 개입 의혹에 휩싸여 있다. 법원에 대한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법관들은 연일 집단적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나마도 검찰 수사를 놓고는 의견이 갈린다. 분명한 매듭을 짓지 않고는 사법부가 한 걸음도 나갈 수 없게 된 상황이다. 단순한 재판거래 의혹만 해도 심각한 문제다. 재판을 통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협조해온 사례'를 상고법원 도입의 거래수단으로 삼았다면 그 자체로 사법의 본질을 훼손한다. 믿고 싶지 않지만 만에 하나 재판 내용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면 민주주의의 근간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고 검찰의 칼을 빌려 법원을 수술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더구나 대법원의 고발은 극약처방이다. 다른 처방으로 치료할 수단이 없는지 먼저 모색해야 한다. 가장 긴요한 것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빠른 결단이다. '고발 조치 검토' 이전에 정확한 진상 파악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조사단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핵심 관계자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당사자들의 비협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김 대법원장은 공개적인 입장표명이든 비공개 물밑접촉을 통해서든 핵심 관련자들의 조사 협조를 촉구해야 한다. 양 대법원장 역시 대승적 결단을 통해 법원의 조사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양 대법원장의 말처럼 평생을 몸담은 법원이 거센 불길에 휩싸여 있다. 더구나 자신의 재임 중 일어난 일 때문이다. 의혹을 완전히 부인하는 발언만 남긴 채 외면하는 것은 전임 사법부 수장으로서 온당하지 않다. 전·현직 대법원장과 내부 구성원 모두가 불을 끄기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한다.


"우리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결정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결정이 최종적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는 것이다.
"(로버트 잭슨 미국 연방대법관). 이 같은 선언을 당당히 할 수 없는 법관과 법원이라면 국민의 권리에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노동일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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