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기고만장하지 않겠습니다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6.04 16:57

수정 2018.06.04 16:57

최저임금 효과 두고 실랑이
지지율 높다고 뻗대지 말고
현장 목소리에 귀 기울이길
[곽인찬칼럼] 기고만장하지 않겠습니다

3년 전인가, 집사람과 설악산에 오른 뒤 백담사 쪽으로 내려왔다.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 백담마을에서 황태 해장국 한 그릇 먹고 서울로 돌아가려는데 '만해마을'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한옥 펜션인가? 궁금해서 가봤다. 안 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마을은 백담계곡과 십이선녀탕계곡 사이에 있다. 만해문학관이 먼저 반긴다.
전국에 흔한 문학관하곤 좀 다르다. 마을이란 이름이 더 어울리게 지었다. 꽤 넓은 땅에 숙박시설도 있고, 수련원도 있다. 집사람과 나는 북카페에서 한참을 쉬었다. 산행 피로를 풀기엔 딱이었다.

그땐 몰랐는데, 이 마을을 지은 이가 신흥사 조실(祖室) 오현 스님이다. 조실은 사찰의 최고 어른을 말한다. 법호는 설악(雪嶽), 법명은 무산(霧山)이다. 오현 스님은 지난 2003년 설립한 만해마을을 동국대학교에 기부했다. 독립투사.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만해 한용운은 동국대 전신인 명진학교 1기 졸업생이다. 오현 스님은 평생 만해의 사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힘썼다.

오현 스님이 지난달 입적했다. 다비식도 치렀다. 스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임종게가 입속을 구른다. "천방지축 기고만장/허장성세로 살다 보니/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억!"

하늘이 어느 방향인지, 땅의 중심이 어딘지 모르고 허둥댈 때 천방지축(天方地軸)이라 한다. 기운이 만장이나 뻗칠 만큼 우쭐해서 뻐기면 기고만장(氣高萬丈)이다. 한 장(丈)은 열 자다. 한 자는 손을 폈을 때 엄지손가락에서 가운뎃손가락까지 길이다. 내 손을 재니 20㎝가량 된다. 여기에 10을 곱하면 200㎝, 곧 2m가 한 장이다. 만 장이 얼마나 긴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묵직한 내공도 없이 떠벌리기만 하는 것을 허장성세(虛張聲勢)라 한다. 늘 빈수레가 요란하다.

스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겸손이 아닐까. 임종게는 세상을 내리치는 죽비다. 돈 좀 있다고 뻐기다 큰코다친 사람을 여럿 봤다. 정치인들은 허장성세의 달인들이다. 세금이 마치 제 돈이라도 되는 양 이거 해주겠다, 저거 해주겠다 온갖 생색을 다 낸다. 일단 지르고, 모자라면 세금을 더 걷는다. 6.13 지방선거에서 보듯 허풍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껑충 뛴 최저임금이 잘됐느니 못됐느니 말이 많다. 국책 한국개발연구원(KDI)이 4일 내놓은 속도조절론에 귀를 기울이자. 대통령 지지율이 70~80%를 넘나든다고 기고만장, 귀를 닫지 않으면 좋겠다. 반면에 지지율 10%대 바닥을 기는 정당은 여론조사 결과에 어깃장을 놓을 게 아니라 왜 이 꼴이 됐는지 반성부터 하는 게 순서다.

오현 스님은 시조 시인이기도 하다. 2007년 정지용문학상 수상작으로 '아득한 성자'란 작품이 있다. "하루라는 오늘…(중략)/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중략)/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죽을 때가 지났는데도/나는 살아있지만…(중략)/천년을 산다고 해도/성자는/아득한 하루살이 떼."

스님이 남긴 열반송을 친구한테 카톡으로 보냈더니 답이 왔다.
한 사람은 "이마는 아직 맨질맨질 ㅋ", 다른 사람은 "이마가 간질간질한 게 아무래도…"라고 했다. 내 이마는 어떨까. 만져보니 아직 뿔은 안 났다.
그런데 어쩐지 좀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러다 어느날 갑자기 뿔이 솟으면 어쩌나. 생각만 해도 억!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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